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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순

    회차 방송일 내용
    253회 2017-12-17

    현진영 Go 진영 Go ▶ 아픔을 딛고, 힙합의 전설이 된 소년
    90년대 한국에 힙합 열풍을 몰고 온 ‘레전드’ 가수 현진영! 후드 티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파격 자체였고, 젊은이들은 그의 춤과 패션을 따라하며 ‘현진영 Go 진영 Go’를 외쳤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댄서들이 실력을 겨루 던 이태원에서 불과 열여섯에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스무 살에 가요계의 최정상에 올 랐지만, 사실 그가 일찍부터 프로 댄서의 길을 선택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중학 생 때 어머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가장 아닌 가장이 된 그는, 낮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에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었다. 일찍부터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 십대 때 두 번이나 차가운 한강에 뛰어 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그를 성장하게 했고, 삶의 경험 들은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에게 가장 큰 인기를 가져다준 <흐린 기억 속 의 그대>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만들어진 노래였다. 인생의 빛과 그림자 를 일찍부터 겪으며 굽이굽이 헤쳐 온 가수 현진영의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난다.
    “되게 프로다웠어요. 제가 살면서 춤을, 내 눈앞에서 턴을 열 세 바퀴를 파박 도는 걸 처음 봤어요. 그래서 와 이 친구 춤을 진짜 잘 춘다 했죠. 무지 열심히 했어요. 진짜 독하게 하긴 했죠. 가정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자기가 너무 좋아하니까. 자기가 너무 좋아하고, 춤추는 거랑, 그리고 춤만 잘 추고 싶지 않고 노래도 잘하고 싶어서 노래 연습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되게 좋게 봤어요.” ― 가수 구준엽 인터뷰 中
    “‘흐린 기억 속에 그대’를 만들고, 그게 사실 너무 운이 좋았는지 나오자마자 1등을 했어요. 2주 만에 1등을 하면서, 삶 자체가 망각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예전에 힘들고 고생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눈 감고 뜨니까 신데렐라가 돼 있었다고 해야 될까? 너무 교만했어요. 나중에 3집 앨범 나와서 그것도 히트를 치고 있는데 또 사고가 난 거죠. 앨범 내고 한 달 만에. 그리고 모든 걸 잃었죠. 돈, 명예,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 아버지와 여동생 빼고 다 잃었던 거죠. 사람도 다 떠나고, 설 무대도 다 없어지고, 방송은 아예 아무 데도 못 나가고. 심지어는 밤업소도 저를 쓰는 데가 없었어요.” ― 현진영 인터뷰 中
    ▶ 공황장애와 파산까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를 지켜 준 아내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수차례의 약물 파문으로 현진영의 인기는 물 거품이 됐다. 혹독한 슬럼프를 겪으며 그는 불면증과 우울증, 공황장애까지 앓았다. 그렇게 그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 오서운이 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는 아내는 18년째 한결같이 현진 영의 곁을 지켜 주었다. 거듭된 위기에도 아내의 변함없는 지지와 보살핌 속에 현진 영은 차츰 안정을 찾았고, 재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과 별개로 사업 수완은 부족했는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획사를 설립했던 사업에 실 패하면서 그는 또다시 파산이라는 위기를 맞는다. 13년의 만남 끝에 아내와 결혼식 을 올리고 나서 바로 이듬해였다. 인생의 힘든 고비들을 함께 건너온 현진영, 오서 운 부부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처음 만날 때 남편이 되게 안쓰럽고 그랬어요. 모든 사람이 안쓰럽다고 그 사람을 다 그렇게 챙겨 주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희 남편 같은 경우는 어느 날 만나고 나서 헤어지고 남편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세상에 남편 혼자 덩그러니 딱 떨어져 있는 느낌, 그 느낌을 딱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챙겨 줘야 되겠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던 것 같아요.” ― 아내 오서운 인터뷰 中
    “그런데 저희 와이프가 제 악기만 나중에 사줬어요. 압류가 붙은 상황에서 경매가 붙었을 때 돈을 구해서 다시 본인이 경매를 받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악기는 안 빼앗겼죠. 저한테는 소중한 악기죠. 악기가 없으면 음악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물론 가수니까 노래를 해도 되는데, 작곡가이기 때문에 무대에 서지 못 하면 곡을 만들어야 음악을 하는 거라고 와이프도 생각을 하니까, 저게 없으면 이 사람은 양 팔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기는 찾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 현진영 인터뷰 中
    ▶ 재즈 뮤지션으로 변신한 힙합 전사의 멈추지 않는 도전
    후회되는 일들도 아픔도 많았던 삶이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고마운 아내와 함 께하는 지금이 현진영에겐 더욱 소중하다. 소중한 일상을 지키고 경제적으로도 재기 하기 위해 방송 출연, 작은 공연과 강연, 인터넷 라이브 방송 등 가리지 않고 끊임없 이 노력하고 있다. 마흔 일곱이 된 ‘힙합 전사’ 현진영은 요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 다. 재즈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앨범을 발표하고, 그가 십대 때 힙합 댄스를 추 던 이태원에서 재즈 공연을 한다. 대중음악에 비해 수입은 적어도 재즈 클럽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영예로운 일이라는 그의 음악적 자부심은 역시 뮤지션이었던 아버지 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1세대 재즈피아니스트 故 허병찬이다. 죽 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무대에 서고 싶다는 현진영에게 아버지라는 큰 산 은 여전히 든든한 지원군이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그 리고 자신도 언젠가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바닥을 딛고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 는 가수 현진영의 음악적 열정과 인생 이야기, 사랑하는 아내와 알콩달콩 다투는 귀 여운 일상 속 매력까지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본다.
    “제일 행복할 때죠. 무대에서 노래할 때가. 제가 좋아하는 '숨'을 최고로 극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무대는. 무대는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쉬는 숨으로는 안 되는 데잖아요. 힘껏 들이마시고 힘껏 내뱉어야 사람들이 알아듣는 장소가 무대잖아요. 그때 저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죠. 나는 살아 있어. 비록 내가 바닥까지 갔을지라도 여기 위에서만큼은 나는 최고야. 내가 살아 있는 곳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요.” ― 현진영 인터뷰 中
    “다시 예전의 정상의 인기를 찾을 수 있는 길이 꼭 있을 거예요. 그 기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것뿐이지. 그만큼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지금 시대에 코드가 조금 안 맞아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그런 것뿐이지 언더그라운드 재즈 클럽에서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같이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잖아요. 그게 대중적인 인기를 다시 갑자기 확 끌어내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지. 그러니까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오면 다시 크게 부각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가수 박남정 인터뷰 中

    252회 2017-12-10

    세월이 준 선물 – 노사연 편 █ 데뷔 40년, 국민가수가 되기까지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로 화려한 데뷔를 치르며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가 수 노사연. 그러나 소위 ‘비디오 형’이라 불리던 뛰어난 외모의 가수들이 각광 받던 시대, 그녀는 상처를 받고 고심 끝에 메이저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에서의 활동을 펼 치게 된다. 1986년 1집 ‘님 그림자’를 발표하며 재기 아닌 재기를 하며 깊이 있는 색 깔을 가진 음악으로 주목을 받는다. 노래 뿐 아니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MBC ‘일요일일요일 밤에’의 엠씨로 활약하며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 을 알리던 그녀. 방송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던 ‘만남’이 우연치 은 계기로 히트를 치며 대중가수로서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
    “ 저는 가수로서는 좀 언젠가 내 때가 와야 되는데 내 노래가 언젠가는 내가 언젠가 한 번은 내 목소리로 정말 할 수가 있는데 그런 확신 같은 거 있죠. 그런 거는 있고 나 왜 이렇게 안 되지 어떡해 이런 초조함은 되게 없었던 거 같고요 어떡하지 내 목소리가 노래에 대한 그런 거는 크게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분명히 내 목소리로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해주는 노래가 나올 거라는 나 나름대로의 마음은 있었고요 ” - 노사연 int
    ‘만남’의 엄청난 히트 후 이무송과의 불타는 사랑으로 가수활동에는 비교적 뜸했던 그녀. 2015년 발매된 싱글 ‘바램’이 성인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가수로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데뷔 40년차 국민 가수 노사연. 그녀의 노래와 가정, 사랑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 40년 노래인생의 위기
    어느덧 데뷔 40주년을 맞이하게 된 노사연. 변함없이 자신을 응원해준 팬들의 성원 에 보답하고자 40주년 콘서트를 기획하며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큰 굴곡 없 이 안정적인 연예계 생활을 지속해 온 것 같은 그녀에게도 뜻하지 않게 찾아온 아픔 이 있었다. 50이 갓 넘은 나이에 급작스러운 청력 손상으로 인해 가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
    “ 제가 진짜 가수가 청력이 약해진다는 거는 정말 숨이 가빠지는 호흡 환자처럼 되게 좌절도 느끼고 처음에 진짜 이거를 많이 희화화시키고 내 나름대로 이제 지나가는 방법이고 실수를 해도 우리가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웃음으로 넘어가는 그런 부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냥 내가 말할 때 신경 안 쓰고 그냥 귀 나쁘니까 대충 이렇게 할 때 진짜 되게 그런 게 서운하거든요 “ - 노사연 int
    방송에서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곱지 않은 시선과 억측으로 인 해 많은 상처도 받았다는 그녀. 그러나 변함없이 곁을 지켜준 남편 이무송과 노래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인해 아픔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40년이라는 녹록치 않은 세월동안 변함없이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인 스스로 를 갈고 닦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 는 노사연의 모습을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의 다시 쓰는 신혼일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노사연은 돌연 깜짝 결혼발표를 알리며 대중들을 놀라게 한 다. MBC 대학가요제 출신의 후배이자 <사는게 뭔지>로 주목받던 가수 이무송이 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상연하 커플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두 사람. 94년 혼인 이후 어느덧 24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연예계 대표 잉꼬 부부로 불리는 두 사람.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한 연만큼이나 쉽지 않았던 고비의 순 간을 맞은 적도 많았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던 노사연은 이무송의 개인적인 영역 과 시간을 용납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오해는 부부사이에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는 데...
    “ 나를 깎는 거야 결혼은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을 깎는 거더라고 내가 나를 깎아서 자꾸 나를 둥글게 만들면서 모나지 않게 어디든지 다 가는 거더라고. 결국은 나를 고치는 것이 결혼생활이지 우리남편을 내가 어떻게 내가 당신하고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 만나가지고 내가 어쩌고저쩌고 당신하고는 내가 맨날 이랬지만 그게 알고 보니까 다 내 탓이더라고 ” - 노사연 int
    각기 다른 생각 차에서 불거진 크고 작은 다툼으로 얼룩졌던 세월을 지나, 비로소 각 자의 삶을 존중하고 서로의 시간을 허락하게 되었다는 부부. 서로 신뢰하며 더 이상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넓어진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오 랜 세월을 견뎌낸 부부에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행복일 것이다. 노사연 이무송 부부 의 애정 가득한 일상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251회 2017-12-03

    오춘기 박상면, 인생 후반전을 뛰다 ■ 쉬지 않고 뛰어온 인생 전반기, ‘마라토너’ 박상면의 연기인생
    1993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첫 연기 인생을 시작한 박상면. 어릴 때부터 친구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이며 연예인을 꿈꾼 소년은 자라서 25년간 국민들의 꾸준 한 사랑을 받는 연기파 배우가 됐다.
    “상면이는 내가 봤을 때도 재능이 있더라고. 노래도 거의 전문가 수준이고 예능성도 있지. 주변 사람을 아주 즐겁게 해 주잖아. 개그맨 뺨칠 정도로 말솜씨도 좋고.” - 이덕화 인터뷰 中
    “전교 응원단장, 반 오락 단장 그걸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 까지 군대 가서 까지도 단 한 번도 빼앗겨 보질 않았어요. 옆에서 선배님들이나 선생님들이 많이 예뻐해 주셔서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빼앗겨 보질 않았어요, 단 한 번도.” - 박상면 인터뷰 中
    어머니 친구 분들이 놀러올 때마다 밥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렸던 꼬마 는 시트콤 <세 친구>에서 끼를 그대로 발산해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 <넘버 3>,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드라마 <왕초>, 시트콤 <세 친구> 등 60여 개 의 작품에서 감초 역할을 책임져온 그가 어느덧 데뷔 25년차를 맞았다. ‘연기파 배 우’ ‘명품 연기’ ‘믿고 보는 배우’ 등 다양한 수식어를 얻으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 연예인을 꿈꾸던 그 순간부터 25년 동안 배우의 길을 달려온 그의 이야기를 < 사람이 좋다>에서 들려준다.
    ■ 처음 맞이한 공백기 8개월 - 신발끈 고쳐 묶고, 다시 달릴 준비
    ‘재떨이’, ‘하마’, ‘박창주’, ‘양인목’ 등 긴 연기 인생만큼이나 맡았던 배역도 많았다. 한편 그렇게 열심히 달려와 맞이한 51세라는 나이가 그에겐 많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삼촌을 하기에는 나이 든, 아버지를 하기에는 젊은 51세라 는 애매한 나이이기 때문에 8개월 동안 뜻하지 않은 공백이 생겼다. 연기 인생 처음 으로 맞이하는 공백기를 그는 어떤 방식으로 헤쳐 나갈까.
    “지금도 미안한 게 제가 우리 딸 데리고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 단 한 번도 가보질 못 했거든요. 그런데 쉬면서 우리 딸하고도 여행도 한 번 다녀왔어요. 아내도 항상 말해요. 급히 생각하지 말라고. 마음을 비우고 갈고 닦고 기다리면 꼭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거든요. 전 그걸 믿고 있어요.“ - 박상면 인터뷰 中
    누구나 맞이하는 50대, 모두가 넘는 인생의 문턱이기에 위기가 아닌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려 한다는 박상면. 그는 25년 간 달려오며 불렸던 모든 이름들을 잠시 내려놓 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 일상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다.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생 일파티, 가족과 함께 처음 해본 김장, 10년 이상 함께해온 연예인 축구단 ‘일레븐’ 단 원들과의 즐거운 경기까지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 내 인생의 하나 활력소를 꼽는다면, 단연코 가족
    형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7년 열애 의 결실을 맺었다. 결혼과 동시에 딸 윤진을 얻고 영화 <넘버3>의 재떨이 역을 완벽 하게 소화하며 충무로의 샛별로 떠올랐다. 박상면이 기나긴 인생 마라톤을 하는 동 안 묵묵하고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 건 그의 아내였다.
    “저희 딸은 우리 와이프가 다 키웠죠.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부터 학원 데리고 다니는 것 까지.. 딸이 한국에 있을 때는 제가 한창 바쁠 때라 애를 돌보지 못 했거든요. 와이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내가 저도 잘 챙겨줘요. 제가 새벽 4시에 촬영을 나가면 그 때까지 안 자다가 따뜻한 차를 우려 줘요. 아내는 그때 자요. 밤낮이 바뀌는 거죠 제가 촬영을 할 때엔.” - 박상면 인터뷰 中
    어느덧 22살이 된 딸을 둔 가장 박상면. 부모가 되니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 었다.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간 병원에서 가슴이 내려앉음을 숨길 수가 없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부모님을 보면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는 그.
    “나이 드신 분들은 하루하루가 다르다니까요. 다음 날 하루가 그 전날이랑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살아 계실 때 잘 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버지 들어가세요.’, ‘엄마 들어가세요.’ 하고 돌아서는 뒷모습만 봐도 울컥 해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는 박상면과 중년이 된 아들이라도 여전히 애정 가득한 부모님과의 일상까지 <사람이 좋다>가 함께 한다.

    250회 2017-11-26

    백전무패를 꿈꾸는 서른다섯, 김상혁! ■ 체면을 버리고 마이크 대신 전단지를 쥐다.
    데뷔 후 수많은 소녀 팬들을 몰고 다니던 원조 꽃미남 밴드 클릭비. 1세대 아이돌로 서 전성기를 누리던 그들 중, 거침없는 입담과 솔직한 매력으로 예능에서 맹활약했 던 멤버가 있었다. 바로 ‘김상혁’이다.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쉴 틈 없이 바빴던 그 에게 여의도는 즐거운 일터였다. 연예인으로서 여의도에 뼈를 묻을 줄 알았다던 김 상혁은 어느새 체면을 버리고 길에서 전단지를 건네는 식당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번번이 복귀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서 실패하고 마냥 기다리다 보니까 또 집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머니나 형한테 누가 되는 것 같고 혹시 방송을 영원히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내 앞가림을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김상혁 인터뷰 中
    ■ 음주운전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12년... 가족이 있어 무너지지 않았던 김상 혁
    2005년, 김상혁의 나이 스물셋. 인기 정상에서 벌어진 음주운전 사건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잘못된 발언이 큰 화를 불러일으켰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에 대중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큰 사랑을 받았기에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복귀를 시도했으나 쏟아지는 악플로 방송 출연이 무산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복귀 할 때마다 실패하고 그게 또 반복이었어요. 아직 많은 분이 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는구나 느꼈죠. 내 탓이니까 받아들이자 그냥 기다려보자 난 나대로 또 열심히 살아보자. 포기한다기보다 조바심을 갖는 거보다 그냥 기다렸어요.” - 김상혁 인터뷰 中
    음주운전 사건으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졌다. 사건 후, 어머니 역시 사람들의 시선 이 두려워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 된 것이기에 김상혁은 가족들에게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 니의 잔소리를 듣고 살았던 김상혁. 그렇다 보니 점점 어머니와의 대화도 줄어만 갔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살고 있던 집과 모든 부동산을 정리 하게 되자 김상혁은 어린 시절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마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제가 힘들어지고 집에 일이 생겼을 때 아버지조차도 밉더라고요 왜 내 옆에 없는지 근데 그건 또 이기적인 거잖아요 여유가 없다 보니 아빠조차 미운 절 봤을 때 이런 못난 놈이 있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말을 한번 듣고 싶어요 괜찮냐고” - 김상혁 인터뷰 中
    10년 넘게 조심하란 잔소리와 질책만 듣고 살았던 김상혁.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라도 위로가 받고 싶다. 김상혁이 웃음을 찾게 된 건 1년 전, 형이 결혼하고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조카가 태어난 후, 가족 간의 대화 가 이어지고 집안엔 웃음꽃이 피게 됐다. 자신으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낸 가족과 세상에 태어난 조카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 다짐하는 김상혁.
    “우리 엄마랑 형이랑 형수님 또 조카... 제가 나쁜 생각 안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들? 약해지거나 포기하거나 이런 안 좋은 생각들 안 하게 되는 원인이고 제 삶의 모터죠 모터“ - 김상혁 인터뷰 中
    ■ 기다림을 배웠지만 포기는 없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와는 달리 가끔씩 들어오는 방송 일을 제외하면 현재 김상혁 의 고정스케줄은 라디오 하나뿐이다. 이제는 카메라 앞에 서야 할 곳이 무대가 아닌 관객석이어도 그는 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곤 한다.
    “방송 흐름상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주가 아니더라도 제가 있으면 뭔가 좀 좋은 그림들이 나올 거라는 자신감은 있거든요.” - 김상혁 인터뷰 中
    김상혁은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클릭비의 월 차’라는 웹 예능 방송을 시작으로 대중에게 먼저 손을 내밀려 하는 김상혁. 앞으로 도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말한다.
    “SNS 웹 예능을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소통하는 게 저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최선일 수도 있고 최선의 소통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요즘 너무 신나요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소통을 다시 했지 대중 여러분들과 고맙더라고요.” - 김상혁 인터뷰 中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인기 정상의 자리에 섰지만 음주운전 사건으로 한순 간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김상혁. 반성과 깨달음이 공존했던 12년이라는 시간은 욕 심과 체면을 내려놓은 지금의 김상혁을 만들었다. 새로이 도약을 준비하는 인간 김 상혁의 이야기는 일요일 오전 7시 50분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249회 2017-11-19

    이길 수 없는 시련은 없다 가수 김민우 ∎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 희귀병으로 1주일 만에 세상 떠나
    1990년, 데뷔 3개월 만에 톱스타 가수가 되었다가 지금은 자동차 딜러로 살고 있는 김민우. 지난 7월 갑자기 사망한 아내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 내의 병명은 애초 ‘대상포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희귀질환인 ‘혈구탐식성 림 프조직구증’. 평소 건강했던 아내를 순식간에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아내는 발 병 7일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계속 검사가 이루어졌어요. 많은 검사와 많은 약물. 중환자실에 있는데 위에 매달려있는 것만 20가지. 그걸 계속 보고 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계속 보고 싶고, 너무 그립고…. - 김민우 인터뷰 中 -
    아내는 6살 연하의 회사원이었다. 가수 김민우가 아닌 자동차 영업사원이던 시절, 김민우는 아내의 헌신과 사랑에 반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아내가 고통스러워 하며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맞닥뜨리게 되는 아내 의 빈자리, 딸 민정(9)의 뒷바라지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눈물 한 번 제대로 흘리 지 못하던 김민우는 홀로 찾은 아내의 묘소 앞에 끝내 눈물을 터뜨린다.
    ∎ 데뷔 3개월 만에 화려하게 오른 정상의 자리, 그러나 잇따른 실패와 절 망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김민우는 대원외고에 들어간 뒤 음악에 빠져들었다. 결 국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고 경원대학에서 헤비메탈 밴드의 싱어로 활동하던 중 우연 히 앨범 제작의 기회를 잡게 된다. 작곡가 하광훈, 작사가 박주연, 그리고 가수 윤상 의 도움으로 3년간의 처절한 훈련 끝에 내놓은 1집 앨범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다. ‘사랑일뿐야’, ‘입영열차 안에서’가 연이어 골든컵을 수상하며 무명의 신인가수 김민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활동 3 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훈련소에서 이제 불침번 같은 거 서잖아요, 저희들. 교육대에서 한 달간 생활을 하는데 야간 불침번을 서다가 밤에 그때, 가요톱10이라는 프론데 궁금한 거예요. ‘입영열차 안에서’가 후속곡이었는데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는데 딱 보니까 1위가 된 거예요 제가 없는데. 갑작스런 입대가 굉장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기가 있는데 군대를 갔다 오더라도 복귀하면 이 인기를 다 원상 복귀할 수 있을 거다, 라는 생각도 한편으론 하고 있었죠. - 김민우 인터뷰 中 -
    가요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2년, 김민우의 제대 시기와 맞물려 ‘서태지와 아 이들’이 데뷔했다. 가요계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고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온 힘 을 다해 3개의 앨범이 더 만들었지만 연달아 실패하고, 노래할 무대를 찾아다니던 김 민우는 대출을 받아 녹음실을 차렸다. 그러나 그 녹음실을 화재사고로 잃게 되고, 수 억 원의 빚과 함께 신용불량자가 된 김민우는 끝내 추락하고 만다.
    당장의 생계를 고민하던 그 때, 그가 선택한 것은 외제 자동차 영업사원. 화려한 무 대를 뒤로 하고, 전단지와 명함을 들고 거리에 나섰던 김민우에겐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저에게는 연예인 고객님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반 고객님들이 90퍼센트 이상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처음에 왔을 때 오히려 더 밖에 나가서 외부에서 영업을 많이 하고 많이 돌아다니고요. 고객 한 명을 만나기 위해서 그 분의 마음을 얻고 위해 길거리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명함을 돌리고 그랬어요. 집에 돌아가면 새벽 네 시 이정도 되는 거죠. 그러면 완전히 누우면 아침에 못 일어납니다. 그래서 앉아서 자요. 재킷만 벗어놓고, 셔츠랑 타이만 풀어놓고 자는 거예요. 앉아서 자고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고 또 계속 그런 일정들. - 김민우 인터뷰 中 -
    2006년부터 시작된 판매왕 행진. 한 달에 외제차를 열 대씩 팔았던 그의 기록은 지 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1년 반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생활은 안정권에 접어들었 다. 그는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어내던 그 때의 가슴 부듯함을 잊을 수 없다.
    신용카드 발급 받으면 노란색으로 붙어 있잖아요. ‘본인 외에는 개봉하지 마시오’ 이런 것 있고요. 쫙 뜯고 ARS 눌러서 카드 등록하잖아요. 그거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었을 거예요 신용이 다 회복이 됐고 빚을 다 정리를 했는데 너무 바쁘니까 그것도 모르고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처음에 백만 원이었다가 그게 천 단위였다가요 나중에 억 단위까지 올라갔는데 9천 9백만 정도 통장에 잔고가 있을 때 아침에 ‘입금되었습니다’ 문자가 오는데, 잔액이 1억이 넘어갔더라구요. 그 때 그 느낌. 정말 새로웠어요. 돈 만원 들고 삼사일을 살던 내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산다는 느낌. - 김민우 인터뷰 中 -
    ∎ 오뚝이 인생 김민우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시련, 아내 사별 이후 100일. 딸과 어머니, 그의 삶을 위한 슬프고도 처절한 몸부림
    작년 6월 김민우는 20여 년 만에 새 노래 ‘푸르다’를 발표했다. 아내가 너무나 좋아 했던 노래였다. 지금 김민우는 아내와 딸 민정(9)을 위해 또 다른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요계를 떠나 있었던 그를 도와주는 건 대학교 헤비메탈 밴드 선배 였던 가수 김정민. 김정민은 김민우가 가수의 길로 이끌었던 인연도 있다.
    김민우가 저를 또 가요계로 이끌어주신 분이에요. 군대에 있을 때 ‘입영열차 안에서’를 들으면서, 김민우 씨의 유명세를 보면서 ‘난 지금 여기서 침상 닦고 있는데’ ‘아 부럽다’ 신세한탄도 했었죠. 제대하고 민우한테 사인을 받으러 갔다가 거기 제작자 분들을 소개시켜 줘서 제가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은인 같은 후배에요. - 가수 김정민 인터뷰 中 -
    김민우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또 한 선배는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 자동 차 영업사원 시절 친분을 쌓은 김태원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과거에 명성에 매달 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김민우를 보고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지금 또 한 번의 시련 앞에서 김태원은 그에게 음악을 권유한다.
    도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갖고 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인생의 좌절과 성공을 모두 겪어봤으니, 어쩌면 음악인의 자격을 얻었다고 볼 수 있죠. 삶을 애기할 수 있는, 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자격. 이 친구는 슬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음악을 해야 되요. 음악을 통해 민우도 치유 받아야 해요. - 기타리스트 김태원 인터뷰 中 -
    화려한 가수 데뷔 이후 재기에 실패하고 성공한 자동차 딜러가 되기까지 김민우는 여러 차례 고비를 넘어왔다. 갑작스러운 아내와의 이별은 지금 그에게 찾아온 또 다 른 시련이다.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이겨내기 위해 달리고 있는 감동적인 김민우의 인생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