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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차 방송일 내용
    244회 2017-10-15

    모두잠든후에 지금은 육아중 가수 김원준 ∎ 데뷔 25년, X세대 대표주자에서 늦깍이 아빠로! 가수 김원준
    올해 10월18일은 정확하게 데뷔 25년이 되는 날이다. 1992년 스무살 나이에 자작곡 <모두 잠든 후에>로 등장해 가요 순위 프로그램 연속 7주, 3개 방송사를 모두 석권 했던 원조 꽃미남 하이틴 스타. 지난해 14세 연하 검사와 결혼을 발표하며 화제를 불 러일으켰던 그에게 딸이 생겼다. 허니문 베이비로 이제 8개월된 예은이. 딸은 그의 일상 전부를 뒤흔들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딸바보’란 말을 하게 만든다. 앉으나 서나, 동료가수를 만나던 팬을 만나던 오로지 딸 애기 뿐이다. 말투도 달라졌 다. 표정도 달라졌다. 화려한 솔로 생활은 간데없고, 모든 소비의 중심도 오로지 딸 이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10가지중에 9가지가 힘들다 해도 그 단 한가지. 예은이가 절 보고 웃어주면 그 순간 모든 힘들었던 게 와르르 무너져요. 제가 원래 허스키 보이스인데, 요즘은 톤이 두 단계쯤 올라가 있어요. 까꿍! 맘마! 이런 말을 달고 살아요 - 김원준 인터뷰 中
    ∎ 딸을 얻고 더 절실하게 그리운 아버지, 가수를 반대했던 돌아가신 아버 지와 화해하다
    대대로 의사가 가업인 집에 3남매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 김원준은 한마디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이기도 했지만 음악에 남다른 애정이 있어 어릴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는 물론 음반과 전축, 헤드폰 등을 선물로 주곤 하셨다. 그러 나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생활. 의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김원준 은 서울예대 진학도 숨겨야했는데...<모두 잠든 후에>로 1위를 한 뒤 들고 간 트로피 도 외면하셨던 아버지. 2013년 막내아들의 결혼도, 손녀딸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마음을 진정 이해하게 된 것은 딸 예은이를 얻고 난 뒤라는데....
    왜 살아 계실 때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나 그런 후회가 많이 들어요. 정말 부모가 돼봐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병원 대기실에 제 사진과 앨범 자켓을 걸어놓고, 제 음반대상 트로피를 진료실에 갖다놓을 정도로 저를 인정해주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걸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죠. - 김원준 인터뷰중
    요즘 원준이는 정말 처음 보는 모습이에요. 근데 딸에게 하는 걸 보면 저게 집안 내력이구나 싶어요. 애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일하다 들어오면 원준이를 업어주고, 재워주고 다 그랬거든요. 그걸 지금 가르쳐주지 않아도 똑같이 하는 거에요. - 김원준 어머니 인터뷰 중
    ∎ 처음 맛 본 인생의 쓴 맛, 2005년 무렵의 파산위기...가수 김원준을 교 수 김원 준으로!
    톱스타 김원준이 방송에서 사라진 것은 2002년 무렵. 싱어송라이터로 대부분의 노 래를 스스로 만들던 그는 자기만의 음악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모아놓은 돈을 모두 투자해 녹음실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사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는 영리하고 똑똑한 사장이 아니었다.
    아는 형이 와서 원준아 녹음실 한번 쓸께 하면 응 써, 계산은 나중에 할게 그래그래.... 영화음악하는 선배도 와서 너네 시설 좋더라 한번만 쓰자 하면 그래 형, 근데 꼭 결제해줘 하면 그때는 그럼 그럼 하지만 또 지나면 흐지부지되고... 그러다 어느날 보니까 빚이 엄청나게 불어 있었던 거죠. 은행에 갔더니 이대로 놔두면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거에요. 숨이 턱 막혔죠. - 김원준 인터뷰 중
    하지만 절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을 막음해주실 분도 아니었 다. 녹음실은 부도 처리됐고 당시 그가 해결해야 할 빚은 6억원이 넘었다.살면서 단 한번도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들어오 는 행사란 행사는 모두 뛰었다. 지방의 작은 축제도 가고, 대형수퍼 사은행사장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그런데 그 때의 실패가 김원준을 지금 교수(강동대 실용음악 과 학과장)로 만들었다는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무렵에 여러 대학에서 시간 강사일을 하게 됐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려니 공부를 해야되잖아요. 근데 공부를 하다보니 또 욕심이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대학원도 가게 되고, 새롭게 실용음악과를 만드는 대학에서 교수 채용공고가 나서 제가 원서넣고 면접보고 해서 지금 학과장이 됐어요.
    음악실 부도나고 실패했던 게 엄청난 경험이 됐죠. 음악이란 게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어떤 장비가 좋고, 어떤 시설을 갖춰야 하고, 당장 학생들에게 뭐가 필요한 지 그걸 녹음실을 하면서 너무 잘 알게 됐던 거죠. 제가 국내에선 신디사이저를 도입한 거의 초기 사람이잖아요. 두 번은 실패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 김원준 인터뷰 중

    ∎ 예은이의 첫 마디 ‘아빠’를 넣어 만든 ‘딸 바보송’ ...기저귀 갈고 이유 식 먹이 고 육아선배들에게 정보를 얻는 아버지 김원준의 약속
    예은이가 짜증이 나서 울면 노래를 불러준다. 기분이 좋으면 예은이 목소리가 담긴 그가 만든 곡 ‘딸바보송’을 틀어놓고 함께 뒹군다. 예은이에 관한 모든 정보와 일정 을 온 가족와 공유하며, 매일 매일 딸의 건강과 발육 상태를 점검하는 그는 행복하 다.
    특히 홍경민씨 딸 라온이가 우리 예은이랑 얼마 차이가 안 나요. 그래서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 걸어서 물어보죠. 보행기는 뭐가 좋아? 이유식은 어떻게 해야돼? 예방접종 했어?... 진짜 홍경민씨가 보행기를 물려 줘서 아주 잘 쓰고 있어요 - 김원준 인터뷰 中
    예전엔 만나면 학교와서 강의를 해달라, 무슨 공연 애기, 음악 애기 그랬는데, 요즘은 오로지 딸 애기. 그거 아니면 우리 할 애기가 없어요 - 홍경민 인터뷰 중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늘 고독했던 노총각 생활을 끝나게 해 준 고마운 아내와 딸, 칠순이 넘은 나이에 손녀딸을 봐주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가수 인생 25년을 지나 두 번째 인생의 무대에 선 김원준의 고군분투 육아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예은아, 엄마랑 아빠랑 니 이름 짓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 니가 재주도 많고 은혜도 많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예은이라고 지었어. 언제 어디서나 반짝반짝 빛나는 예은이가 되길 아빠는 소망한다. 그리고....약속할게...아빠도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 김원준 인터뷰 中

    243회 2017-10-08

    달려라 하늬 ▶ 이하늬의 30년 지기 베스트 프렌드, 내 친구 가야금을 소개합니다
    2006년 우연히 나가게 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당당히 ‘진’을 거머쥐며 사람들 에게 얼굴을 알린 배우 이하늬! 이후 MBC 드라마 <파스타> 영화 <타짜2> 등을 거 치며 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최근 출연한 MBC 드라마 <역적>에서 창이면 창, 장구춤에 승무까지 예인 못지않은 가무를 뽐내며 장녹수를 그려냈다는 극찬을 받은 그녀. 알고 보니 이는 국악을 전공한 내공에서 나온 실력이었다. 이하늬는 서울대 국악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 국악과를 졸업한 국악 엘리트다. 이 하늬의 언니인 이슬기 씨 또한 현재 가야금 연주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 자 매가 가야금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건 다름 아닌 어머니 문재숙 교수의 영향이 크 다. 이하늬의 어머니가 바로 가야금산조 및 병창을 보유한 국가무형문화재 23호인 것. 지금은 언니 이슬기 씨와 이하늬 모두 다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이수자로 어머 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 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가야금을 놓지 않고 있는 이하늬는 세 모녀가 함께 이룬 가족 밴드 ‘이랑’을 통해 가야금 앨범도 주기적으로 발매하고 있 고 작년에만 2번의 독주회를 개최했다. 공연이 있을 때면 그녀는 스케줄을 끝내고 밤 늦게 집에 돌아와서도 가야금 연습을 하느라 눈 붙일 틈이 없다. 때로는 연기 생활 과 연주자의 길을 병행하며 버거움에 남몰래 눈물 흘리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찾 고 싶을 땐 어김없이 가야금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천상예인 이하늬, 그녀에게 가야 금은 30년을 함께한 베스트 프렌드이다.
    가야금은 저한테 고향 같고, 친구 같은 존재죠. 사실 고향 안 가도 살 수 있잖아 요. 그런데 가면 너무 좋잖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연기하면서 캐릭터에 빠지면 저 를 잃어버릴 때가 있거든요.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지?’ 이런 생각을 문득 문득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가야금을 딱 잡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요.“ - 이하늬 int ▶ 잘 나가는 여배우 VS 인간문화재 어머니,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모녀
    지난해부터, 영화 3편을 촬영하고 드라마 역적으로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은 이하 늬. 작품에 뷰티프로그램 MC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화여자대학교 국 악과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녀가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바로 이번 해에 교수직 은퇴를 앞둔 어머니 문재숙 교수 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전수받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 집에는 장난감보다 가야금이 많았고 그 덕에 가야금이 악기인지 장난감인지 모를 4살 때부터 이하늬는 가야금을 가지고 놀았다. 어릴 때부 터 항상 함께한 터라 이하늬는 연기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지금도 가야금은 자 신의 뿌리라고 말할 만큼 가야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오는 12월 가야금 산조 독 주회를 앞두고 있는 그녀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독주회 전 부지런히 어 머니에게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쉽지 않은 것. 인간문화재이 자 지도교수인 어머니는 여배우보다 더 바쁘다. 과연 이하늬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그리던 레슨을 받을 수 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희로애락에 대한 깊이가 생기기 때문에 음악을 이해하는 폭 도 더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가야금을 통해 잘 표현하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가 않아요. 근데 어머니는 그걸 가야금으로 온전히 표현해내는 분이니까 그걸 가장 배우고 싶죠. 그리고 어머니가 제 가야금 인생에 알파오메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 어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가야금 산조에 인간문화재니까 다른데 갈 수가 없죠.” - 이하늬 int ▶ ‘명품몸매’ 이하늬, 필라테스 지도자에 도전하다!
    요즘 그녀는 연기가 아닌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바로 필라테스다. 취미로 배우는 것이 아닌 지도자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는 이하늬. 해외스케줄을 마치고 돌 아와서 휴식까지 반납하며 강사시험에 임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가 야금을 연주했던 터라 몸이 말이 아니라는 그녀. 오른손으로 줄을 뜯고 왼손으로 팽 팽한 현을 누르는 가야금 연주법 탓에 왼쪽 손가락은 중지와 약지가 겹쳐질 정도로 휘었고,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장시간 연주하다보니 목과 척추가 틀어져 밤마다 고 통을 호소하는 것은 기본이다. 심할 때는 마비증상에도 시달린다. 자신뿐만 아니라 척추가 15도나 틀어졌다는 문재숙 교수를 비롯해 언니 등 주변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숙명처럼 고통을 지고 사는 것을 봐왔다는 그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 움이 되고 싶어 필라테스 강사에 도전했다. 하루 빨리 운동과 몸에 대해 익혀 주변 이들을 고통을 조금이나 덜어주고 싶다는 이하늬. 쉴 틈 없다고 푸념하면서도 새로 운 것에 도전할 때 가장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그녀. 나날이 새로운 그녀의 일상 을 <사람이 좋다>에서 따라 가본다.
    “필라테스 지도자 과정은 운동뿐만 아니라 해부학도 공부해요. 그래서 몸에 대해 서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죠. 사실 제가 악기를 오래해서 뼈가 휘어 있거든요. 척 추 자체가 돌아가 있다 보니 통증과 마비증상이 같이 와서 고생을 좀 했어요. 그런 데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나 언니, 악기 하는 제 주변 친구들이 전부 기본적인 통증은 그냥 내 친구라고 생각 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이게 기본적으로는 어쩔 수 없 는 것이긴 하지만 나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는 생각에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게 됐어요.” - 이하늬 int ▶ 이하늬, 가야금으로 기네스 등재에 도전하다?!
    가야금을 알릴 수 있는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이하늬. 그녀가 이번 가야 금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바로 세계 최초, 세계 최대 규모의 가야금 공연으로 기네스 등재에 도전한 것. 4세부터 77세 어르신까지 전국에서 온 1168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이 공연의 기획자는 다름 아닌 이하늬의 어머니, 문재숙 교수다. 4년 전 중국 은 가야금을 자국의 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모자라, 대규모 가야금 공연으로 기네스 북 등재까지 시도했다. 이에 분노한 문재숙 교수는 중국의 854명 가야금 공연 기록 을 뛰어넘는 무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재임에도 어느 하나 관 심 갖는 이 없어 공허한 외침만 내뱉길 4년째. 마침내 하나둘씩 모여든 도움 덕분에 4년 만에 ‘천사금(1004琴)의 어울림’이라는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하늬도 기획 단계부터 발 벗고 나섰다. 바쁜 와중에도 ‘천사금’ 연습은 빼먹지 않고 참여하는 것 은 물론이고 SNS에 공연을 홍보해 천 명이 넘는 참가자를 모으는 일 역시 그녀의 담 당이었다. 80만이 넘는 팔로워가 있는 그녀의 SNS 덕분인지 애초에 1004명도 무리 일거라는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1168명의 사람들이 공연에 참여했다. 언니 이슬기 씨 또한 어머니 문재숙 교수를 도와 기획부터 행사 진행까지 뒤에서 묵묵히 문 교수 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챙겼다. 오로지 가야금 사랑에서 출발한 이 공연은 세 모녀 의 노력으로 기적처럼 실현됐다. 1168명이 만들어내는 가야금 하모니, 그리고 1168 명의 중심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이하늬의 모습이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 다.
    “가야금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악기가 아니에요. 우리 민족하고 2000년을 동고 동락한 악기 인데 이 악기가 마치 중국의 악기인 것처럼 세계에 소개 되는 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좀 거창한 주제인지 모르지만 저는 문화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민 족이 산다고 생각해요. 비록 아무도 알아주는 이는 없었지만 그런 신념으로 4년 동 안 이 공연을 준비했어요.” - 어머니 문재숙 교수 int

    242회 2017-10-01

    나 여기 살아있다고 – 원미연 편 █ 원조 디바 원미연, 8년 만에 무대 위로 돌아왔다!
    개그우먼 뺨치는 입담과 풍부한 가창력으로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많은 사랑을 받아 온 가수 원미연. 1985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데뷔해 이별여행, 조금 깊은 사랑 등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발라드의 여왕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런 미연이 최근 신곡 <소리 질러>를 발표하고 8년 만에 콘서트를 열며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 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 다시 세상 밖으로 ‘가수 원미연’을 내보이고 싶었다는 그 녀. 신곡 ‘소리 질러’는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곡이자, 그녀 스스로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하다. 나 아직 살아있다고. 꿈이 있다고. 한 가정을 책임지는 엄마이지만 아직도 가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자신처럼, 여전 히 꿈을 꾸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곡이다. 설 수 있는 무대와 적극적인 구매층이 많지 않은 중견 여자 가수에게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녀 역시 앨범을 내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과연 나 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앨범을 냈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혼 자만을 위한 앨범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미연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 는 새로운 신곡과 콘서트로 대중 앞에 서며 ‘가수 원미연’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드러 내게 되었다.
    “ 요번 노래를 들려드리면서 마음의 노래를 하고 싶어요.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노래 그래서 우리 나이에 아니면 우리보다 조금 나이는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노래를 하는데 있어서 가사는... 그 노래 가사가 나한테 와 닿으면 그게 내 노래가 될 수 있으니까. ” - 원미연 int
    “ 용기가 대단한 거 같아요. 저도 지금 음반을 지금 활동을 한다 안 한다로 표현하면 하기는 하는데 열성적으로 하지는 못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대단한 거 같아요. 가게도 하시면서 콘서트도 하고 방송도 하고 그런 부분들이 자극이 되기도 하고 본받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대화중에 느끼는 게 많은 거 같아요.“ - 조정현 int
    █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에게 남편을 소개한 사연은?
    댄스가수들의 대거등장과 라디오 진행자의 자리를 내어 놓으며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은 미연. 1997년 라디오 교통방송 TBN의 디제이를 맡게 되며 부산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아는 이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낯선 부산에서의 생활 은 그녀에게 힘들기만 했다. 그런 미연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지금 의 남편인 박성국 씨였다. 두 사람은 당시 진행했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엔지니 어와 디제이로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일들 을 성국 씨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게 되며 점차 정을 쌓아왔던 두 사람. 그러나 단 둘 이 데이트를 한 적이 없을 만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연은 청천벽력 같은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가 위독하 다는 전화였다. 그 말을 들은 미연은 무작정 성국 씨를 데리고 서울로 향하게 되는 데. 과연 미연이 위독한 아버지에게 지금의 남편을 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내가 엄마 아빠랑 서울에 살다가 내려왔지만 여기서는 원고지를 부산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이 사람 밖에 없었거든요. 정말 유빈이 이빠 밖에 없으니까 자꾸만 이제 의지하게 되는 거에요. 뭘 하더라도 의논하고 싶고. “ - 원미연 int
    █ 원미연, 딸의 말 한 마디에 복면가왕에 출연하게 되었다는데?!
    41세에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된 미연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현재 초등학교 6학년 딸 유빈이의 엄마로,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도맡아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딸의 뒤를 묵묵히 보살피는 그녀. 미연이 작년 4월 ‘복 면가왕’ 에 출연하게 된 이유 역시 그녀를 놀라게 한 유빈의 결정적 한 마디 때문이 었다는데... 과연 미연을 오랜만에 무대에 서게 한 유빈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 노래에만 집중을 했어요 그냥. 제가 김건모 씨의 첫 인상을 불렀는데 어우 근데 현장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거에요. 하면서도 이거 됐어 이거 마무리까지 잘하자 미연아 멋있게 좀. 그런데 그렇게 떨리는 무대를 몇년 만에 처음 섰거든요. . ” - 원미연 int
    평범한 주부이자 엄마의 삶에 만족하는 왕년의 디바 원미연. 하지만 무대에 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열정의 소유자이다. 평생 노래가 하고 싶다는 ‘영원한 디바’의 우렁 찬 울림이 사람들을 깨운다. ‘나 아직 살아 있다고’ 꿈과 일상의 균형을 찾는 그녀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241회 2017-09-24

    언제나 청춘, 젊은오빠 임하룡 ■ 개그맨들이 꼽는 최고의 선배, 그 이유
    1981년, 등장과 동시에 재치 있는 입담, 화려한 춤사위로 눈과 귀를 사로잡은 사람 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 임하룡이다. 다이아몬드 춤, 빨간 양말, “이 나이에 내가 하 리?”, “일주일만 젊었어도!”, “쑥스럽구먼.” 등 독특한 춤과 패션, 수많은 유행어들 을 쏟아내며 전성기를 맞았다. 코미디언으로서 20년간 활약했지만 어느 순간 무대에 서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웠던 그. 점점 사라지는 코미디 무대를 떠나 힘든 시간을 보 냈다는데.. 고민 끝에 그는 배우의 길을 택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작은 배역 부터 차근차근 시작한 그는 마침내 8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로 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코미디계의 대부로 활약할 당시에도 임하룡은 후배들을 일일이 챙겼다. 지금 코미 디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국진, 김수용, 김용만, 박수홍 4인방이 1993년 선배들의 오해로 인해 연예계 영구 제명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가장 앞장서서 이들의 입 장을 대변해줬던 선배가 임하룡이다. 그 감사함으로 이들은 지금도 임하룡을 최고 의 선배로 꼽는다.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선배를 꼽자면 임하룡 선배님이시죠. 당시 선배들이 무릎 꿇어라! 이런 상황인데 유일하게 임하룡 선배님이 일어나서 저희 대변을 해주셨어요. 군대도 다녀온 애들인데 얘기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얘기해주셨는데 정말 천군만마 같았죠. - 코미디언 박수홍 인터뷰 中
    저희들의 마음을 다듬어줬던 멘토 같은 분이죠. 어떤 선배를 가장 좋아하느냐, 하면 저는 주저 없이 임하룡 선배님을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이야기해요. - 코미디언 김국진 인터뷰 中
    지금도 까마득한 후배들까지 챙기고,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임하룡. 어느 덧 데뷔 36년 차, 후배들의 멘토이자 롤모델 1위인 임하룡의 코미디언 인생을 <사람 이 좋다>에서 되돌아본다.
    모든 후배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셨어요. 그게 정말 놀라웠어요. 코미디를 항상 모니터 하시고 후배들을 계속 보고 계시더라고요. 이 친구가 이거를 잘한다.. 항상 칭찬해주세요. 저는 아직도 신인 때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주시며 격려해주셨던 걸 잊지 못해요. - 코미디언 문세윤 인터뷰 中
    ■ ‘자중자애’ 가슴에 새긴 사연
    굳건한 아버지는 그에게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금융권에 계셨던 아버지는 오 형제 중 장남인 임하룡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연극배우를 꿈꿨던 그이기에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꿈을 이루고,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아버지는 그 의 성공을 미처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게 아직도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다는 임 하룡. 그는 죄스러운 마음에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항상 강조하던 ‘자중자애’를 인생 의 목표로 삼으며 살고 있다. 그가 건강을 열심히 챙기는 것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 게 된 것도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제가 워낙 공부를 안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저한테 써주신 편지가 있어요. 공부 안 해도 좋으니까 네 몸을 잘 간수해라. ‘자중자애’라고 글귀를 써주셔 가지고 제가 그거는 잘 지켜요.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걱정하셨거든요. 제가 방송활동 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셔서 굉장히 죄스럽죠. 좀 잘 된 모습을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 임하룡 인터뷰 中
    아버지에게 받은 넘치는 사랑은 내리사랑으로 이어졌다. 임하룡의 하나뿐인 아들 은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졸업해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아 들이 안쓰러운 한편, 차근차근 도약하고 있는 영식의 꿈을 묵묵히 응원한다.
    아버지가 했던 행동들이 나를 많이 생각해서 하셨던 일들이구나, 많이 느껴요. 미안함이 워낙 많아요, 아버지한테. 빨리 제가 좀 잘 되고 그래야 아버지한테 얘기를 할 텐데 아쉬움이 많죠. 앞으로는 잘 되어야죠 이제. - 아들 임영식 인터뷰 中
    ■ 경조사계 내비게이션, 사람 좋은 임하룡
    그에겐 젊은 오빠에 못지않은 유명한 별명이 있다. 바로 동네 보안관이다. 한 동네 에서 17년째 살고 있는 그는 동네에서도 모르는 이웃이 없다. 꽃집, 부동산 할 것 없 이 두루 친해 붙은 별명이 보안관이라는데.. 또한 연예계 동료들의 경조사에 안 가 는 곳이 없어 경조사계의 내비게이션이라는 임하룡. 앞으로도 더불어 사는 삶이 남 은 인생의 목표이다.
    부모님이나 친구들 돌아가시거나 아이들 결혼시키는 일은 주위에 항상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매번 만나기가 힘드니까 경조사라도 일부러 찾아가요. 슬픈 일은 위로해주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삶을 살고 싶어요. - 임하룡 인터뷰 中

    240회 2017-09-17

    친절한 현우씨, 가수 이현우 ∎ 미국에서 한국으로, 디자인 회사에서 ‘꿈’꾸던 무대로! 가수 이현우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꿈’을 택한 남자, 90년대 대표 싱어송 라이터 가 수 이현우. 재미교포 출신인 이현우는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한국행 비행 기에 올랐다. 그리고 우연히 음반 제작자를 만나 데뷔곡 <꿈>을 발표, 단숨에 가요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 노래 제목처럼 꿈같은 일이 벌어졌지만, 갑작스레 얻은 인 기엔 부작용도 따라왔다.
    예전에는 저만 생각했어요. 한마디로 나르시시즘에 좀 빠져서 모든 걸 제 위주로 생각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열심히 일하는 스태프들, 주변 연예인들을 아예 보지 못 했어요. - 이현우 인터뷰 中
    ∎ 이현우를 180° 변화시킨 아내와 아이들
    대마초 사건, 음주운전 등 좋지 않은 뉴스로 지면을 오르내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 던 이현우. 그런 그를 일으키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킨 건 가족이었다. 2009년 44살, 늦은 나이에 결혼해 어느덧 9살, 7살의 아이를 둔 가장 이현우. 한때 자기중심 적이고, 비혼주의자였던 그에게 결혼이 가져다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혼을 한 순간부터 저한테 찾아온 큰 변화는 주변사람들을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제가 총각 때 했던 행동들이 제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한테 굉장히 큰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9살 동하, 7살 주하의 아빠 이현우로 아이들과 함께 떠난 글램핑 여행. 아이들을 먼 저 챙기고 난 뒤 다 식은 밥을 먹는 그의 모습은 예전 같으면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 다고.
    아이들은 제 전부예요. 그냥 저의 스물 네 시간이죠. 늘 아이들 생각을 하고 밖에 나가서도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어떤 발언을 할 때 누구와 뭐 술 한 잔을 마실 때도 항상 아이들의 아빠라는 걸 잊지 않고 행동하려고 노력해요. - 이현우 인터뷰 中
    ∎ 가수 이현우, ‘맛집 블로거’, ‘미식가 아저씨’ 이현우로!
    가수는 물론 연예계 다방면에 걸쳐 전천후로 활약 중인 이현우. 특히 그가 10년 넘 게 DJ로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꼭 섭취해야 하는 ‘공깃밥’처럼 생활의 일 부분이 되었다. 라디오 스튜디오 벽면에는 10년 넘게 한 프로그램을 진행한 DJ 이현우에게 수여된 ‘골든 페이스’ 조형물이 걸려있는데, KBS 라디오 DJ를 통틀어 3명만이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실함과 꾸준함의 산물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 음식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어린 학생들에게는 가수 이현우보다 ‘미식가 아저씨’ 이현우로 더 익숙하기도 하다. 미국생활 시절, 일 때문에 바쁜 부모 님을 대신해 요리를 배웠다는 이현우. 그 시기에 요리실력과 음식에 대한 관심을 키 웠다고 한다.
    어릴 때 이민을 가서 엄마랑 시장 골목이나 그 시절의 길거리 음식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거기에 대한 추억 같은 것들이 항상 있었고 한국에 가게 되면 그런 데를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죠. 다른 문화권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다보니 그런 것에 대한 애정이 커요. - 이현우 인터뷰 中
    ∎ 이현우의 ‘꿈’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역시 노래다. 11월에 있을 공연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밴드 멤버들과 연습중인 이현우를 만날 수 있었는데. 특 별히 이번 공연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소극장 무대를 계획하고 있단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감정 전달이에요. 가창력도 아니고, 무대매너도 아니고, 화려한 조명도 아니에요. 관객들하고 똑같은 걸 느낄 때 어마어마한 희열이 느껴져요.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데 그런 순간에 어마어마한 행복감이 있죠. - 이현우 인터뷰 中
    90년대 톱스타에서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까칠한 고슴도치에서 아들바보로 변 신한 이현우. 결혼 이후 ‘내’가 아닌 ‘주변’을 바라보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 었다는 ‘친절한 현우 씨’, 이현우의 달라진 모습을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볼 수 있 다.
    그냥 아이들한테 친구 같은 아빠로 남고 싶고 아내한테는 늘 애인 같은 남편으로, 그리고 제 자신에 있어서는 계속해서 좋은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 이현우 인터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