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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순

    회차 방송일 내용
    779회 2018-07-16

    <옥류관 서울 1호점> 2부 냉면의 민족 지난 7월 9일 방송된 <옥류관 서울 1호점>은 방송인 주병진, 작곡가 돈스파이크 등 평양냉면 냉면을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냉면 예찬과 마지막 남은 평양냉면 1세대 故 박근성 씨의 사연 등이 소개됐다. 또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평양 옥류관 내부가 공 개되어 검색어 순위를 장악했다. 2부에서는 국내에서 공개되지 않은 일본 고베의 원 조 평양냉면집 이야기와 드디어 문을 연 옥류관 서울 1호점 팝업스토어 현장이 공개 될 예정이다.
    ■ 가수 존박, 원조 평양냉면을 찾아 일본 고베로 떠나다
    가수 존박, 그는 대한민국 청년 세대에 불고 있는 냉면 열풍의 아이콘이다. 그가 원 조 평양냉면을 찾아 떠났다. 위치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 존박이 찾은 이 냉면 가게 는 1939년에 문을 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한국 언론에 서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평양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장모란 부부(1964년, 2016년 작고)가 시작해 현재 자식과 손자들이 세 곳에서 평양냉 면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곳은 매일 평양식 김치를 담그고, 손 반죽으로 면을 뽑는 옛날 방식을 고집한다.
    실향민, 이주민들은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서 먹었던 음식의 원형을 지키려는 습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베의 냉면이 일제강점기 때의 평양냉면과 가장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 황교익 음식 칼럼니스트 인터뷰 -
    고베 평양냉면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역사적으로 기록해야 할 곳이다. - 박찬일 셰프˙음식 칼럼니스트 인터뷰 -
    그들의 국적은 ‘조선적’. “조선”은 1945년 광복 직후 재일교포들이 부여받은 국적이 다. 1948년 각각 남북한이 분단이 되면서 일본 정부는 조선적이라는 국적을 무국적 처리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이 아닌 하나의 나라를 바랐던 그들은 분단된 국적을 선택하지 않고 ‘조선’으로 남기로 했다.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조선적’을 택하며 살 아온 재일 조선인들의 애환이 담긴 냉면 한 그릇. 이 사연을 존박이 직접 만나고 왔 다. 원조 평양냉면을 고베에서 맛보고 온 냉면 마니아 가수 존박,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 익, 평양을 20번 이상 방문한 MBC 북한 전문기자 김현경 그리고 한국인 최초로 미 슐랭 가이드 2스타를 받은 임정식 셰프가 모여 냉면의 현재와 미래를 토론하고 ‘옥류 관 서울 1호점’ 레시피를 만들었다.
    ■ 옥류관 서울 1호점이 나타났다!
    지난 4월, 남북한 두 정상이 만나고 한반도에 봄이 찾아왔다. 평양 시민들은 스마트 폰을 보며 거리를 활보하고 평양 시내는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는 등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북한은 상상 이상으로 변해 있었다. 평양 옥류관 냉면도 맛이 변했다. 까 맣고 쫄깃한 면발, 겨자와 식초뿐 아니라 양념장까지 넣어 먹는 모습이 공개되자 평 양냉면 마니아들은 크게 당황하기도 했다. 옥류관 냉면은 왜 변화했고, 무엇을 의미 하는가?
    “사람들의 입맛이 변한다는 건 그 사회가 살아있는 사회라는 거잖아요? ‘북한도 대중의 요구에 반응하는구나’ 변화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 김현경 북한 전문기자 (평양 20번 방문) 인터뷰
    "평양의 옥류관과 똑같은 맛이 서울에 생긴다면 열일 제쳐 놓고 가야죠." - 신동엽 방송인 인터뷰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국을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저는 통일되면 꼭 북한에 가서 먹어볼 거예요." - 김현철 가수 인터뷰
    다가올 평화의 시대, 남한에 옥류관 서울 1호점이 생긴다면 그 냉면은 어떤 맛일까? 서울의 냉면과 어떻게 다를까? 이들의 궁금증과 평화의 염원을 담아 팝업스토어 <옥 류관 서울 1호점>이 문을 열었다. 주인공은 한국인 최초 미슐랭 가이드 2스타를 받 은 임정식 셰프. 그는 서울의 모든 평양냉면과 옥류관 냉면을 재해석해 <옥류관 서 울 1호점>의 냉면을 창조했다. 옥류관 서울점을 열망하던 수많은 평양냉면 마니아 는 물론, 그리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하는 실향민 등 200명 이상이 미리 예약을 하고 팝업스토어를 찾았다. 과연 서울에서 맛보는 옥류관 냉면은 어떤 맛일까? 대망의 옥 류관 서울 옥류관 1호점 팝업스토어 현장이 7월 16일 11시 10분 MBC 스페셜에서 공 개된다.

    778회 2018-07-09

    <옥류관 서울 1호점> 1부 평양냉면 제일일세 ■ 2018 평양냉면 전성시대
    지난 4월 27일,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났다. 꼭 11년 만이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최초로 배달된 음식이자 남북정상회담의 최고 수혜자는 바로 평양냉면이었다. 북한 의 지도자가 남측 대통령 앞에서 수줍게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랭면을 가져왔습니 다”,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라고 말하자 전국이 들썩였다. 서울 시내의 냉면집 은 그야말로 북새통. CNN, BBC 등 해외 주요 언론에서도 앞다퉈 평양냉면을 소개 했다. 남한에 오기까지 긴박했던 ‘옥류관 냉면 공수 작전’과 알려지지 않았던 남북정 상회담 만찬 뒷이야기를 취재했다. 소문난 냉면 애호가 돈스파이크, 김현철, 냉면 성 애의 아이콘 존박, 미식 프로그램 진행자 신동엽 등 유명인들의 냉면 사랑과 폭풍 ‘냉면 먹방’이 맛깔나게 펼쳐질 것이다.
    ■ ‘평양 옥류관’ 전격 취재
    “역시 옥류관 냉면이 제일 맛있더라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총 6그릇을 먹었어요.” - 노회찬 의원 INT -
    “오직 냉면만을 위해서 지어진 웅장한 건물 앞에서 기세에 눌렸어요. 냉면이 이렇게 좋은 집에서 대접받아도 되는 거야?” - 방송인 주병진 INT -
    지난 3월, 남한 공연단이 평양에 방문했다. 공연이 끝난 후 대중들은 그들의 무대보 다 그들이 맛본 옥류관의 냉면에 주목했다. 과연 옥류관의 냉면은 우리의 냉면과 어 떻게 다를까? <옥류관 서울 1호점>은 평양 옥류관 내부와 주방의 조리 영상을 단독 입수했다. 평양 시민들이 직접 말하는 ‘평양냉면 제대로 먹는 법’부터 옥류관 안내원 이 알려주는 메밀 함량과 완벽한 육수를 위한 비밀 레시피까지. 평양 옥류관의 모든 것이 공개된다.
    ■ 마지막 남은 평양냉면 1세대 창업자, 박근성
    1951년 1.4 후퇴 당시 남한에 피난을 온 박근성 씨. 그는 평양 모란봉 냉면집의 장남 이었다. 냉면집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왔다 갔다고 박근성 씨는 기억한다. 홀로 내려온 그는 피난민이 모여 살던 대전 숯골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할아 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로 냉면집을 시작했다. 초가집 앞 멍석을 깔고 먹던 냉 면집에서 현재 대전에서 제일 큰 평양냉면집이 되는 동안 한해 무 만개, 배추 7천 포 기를 담그며 전통을 지켰다.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위로가 된 그의 냉면 한 그릇에 는 실향과 이산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93세가 된 박근성 씨는 눈 감기 전에 고향 평양을 가고 싶은 소망을 과연 이룰 수 있을까?

    777회 2018-06-11

    6월항쟁 특집 : 어머니와 사진사 ■ 기획의도
    1987년 6월, 독재 권력의 억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날 그 거리. 그 거리에는 직격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결국 눈을 감은 학생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의 역사를 취재하던 푸른 눈의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오늘. 거리의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미국의 한 대학 교수가 되 었고 보통의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거리의 투사가 되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바라본 87년의 6월은 어땠을까? 6월항쟁 특집, ‘어머니와 사진사’에서는 이들이 기억하는 그날의 6월 과, 이들이 살아온 31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주요내용
    ◇ 미국인 사진작가 킴 뉴턴(Kim Newton) 이야기
    1985년 당시 미국인 사진작가 킴 뉴턴(Kim Newton)은 <르 피가로>, <타임>, <뉴 스위크> 등의 유명잡지사를 위해 일하는 도쿄 주재 특파원이었다. 그는 1988년 서 울 올림픽으로 한국이 세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1986년 봄, 한국 관광홍보 사진을 찍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 외국인들이 갈만한 제주도의 관광지 사진이나 한국의 경제 발전상황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산업단지와 공단을 찍던 그는, 1987년이 되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이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자 취재를 위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처음 시위 사진을 찍으러 간 날, 그는 방독면이 없어 눈 에 최루가스를 가득 묻힌 채 사진을 찍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그는 다음날 바 로 이태원 암시장에서 방독면을 사 왔다. 그리고 여느 기자들과 다름없이 방독면을 쓰고 서울의 시위 현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매일매일 빠짐없이 서울의 시위 현장을 찾았다. 노태우가 대선 후보로 선 출된 민정당 전당대회에도, 6·10 국민대회가 열린 그 거리에도 그는 현장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취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루탄을 맞은 22살의 젊은 학생이 결 국 세상을 떠나버린 날에도 킴 뉴턴은 연세대학교 앞에서 이한열을 애도하는 학생들 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한열을 살려내라”
    연세대학교 앞은 전경들과 학생들로 가득했고 학생들의 외침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 섞여 있었다. 외침이 멈추고 친구 이한열을 애도하는 묵념과 함께 바람이 불기 시작 했다. 바람에 한 학생이 든 태극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킴 뉴턴은 바람이 태극기 를 펼쳐 주기를 기다렸고 완벽한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바람이 만들어준 이 사진은 유명 시사주간지 U.S. News and World Report에 ‘이주의 사진 (Photo of this week)’으로 선정되어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을 전 세계에 알렸다. 훗날 사진 속 영정 을 든 총학생회장 우상호는 국회의원이, 태극기를 든 사회부장 우현은 유명한 배우 가 되었다.
    그리고 2017년, 그가 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30년 만의 서울은 최루탄 대 신 촛불로 물들어져 있었다.
    “저는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시위대가 여기 나와서 시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거죠. 촛불시위든 태극기 집회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기 뜻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지금이 1987년이었으면 이곳은 최루가스로 자욱했을 거예요” - 킴 뉴턴, 2017년 3월 시청광장에서
    2007년 모교의 교수가 된 킴 뉴턴이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6월항쟁 30주년’을 맞은 작년이었다. 제작진은 1987년 6월항쟁부터 2017년 촛불집회까 지, 이방인인 그의 눈으로 본 한국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 기 위해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MBC 경영진에서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제 작을 중단시켰고 결국 그의 이야기는 2017년에 방송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 해가 지 나, 마침내 그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고 삶이 180도 변한 어머니, 배은심 이야기
    배은심 여사는 아무 걱정 없던 어머니였다. 아들과 딸들이 공부 잘하고 또 건강하게 잘 크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생긴 비극 적인 사건으로 평화롭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버렸다. 아들 한열이는 최루탄을 맞아 쓰러져 27일 만에 눈을 감았다. 아들을 묻고 다섯 해 가 지난해에는 남편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거기서부터 태어난 것 같아요 저는. 그때 내 나이 마흔아홉이었는데 마흔아홉 먹은 나이는 없어진 거고... 나는 거기서부터 태어난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 왔어요” - 배은심 인터뷰 중
    지금 배은심 여사는 광주와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유가협’) 회원들이 살고 있 는 ‘한울삶’을 오가며 살고 있다. 배은심 여사는 ‘한울삶’이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 라고 말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식을 잃은 것, 자식이 땅속에 들어 간 것이다. 그래서 ‘한울삶’의 한쪽 벽에는 열사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이 사진 속 아이들은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한울삶’ 가족들 모두의 자식이다.
    “이한열을 망월동에 묻어 놓고 제2의 장소가 이 집이 돼버렸어요. 저는 이 집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 쓰러진 친구를 지키던 평범한 학생 우석훈 이야기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그날은 유독 최루탄이 많이 터지던 날이었다고 한 다. 당시 경제학과 2학년 학생이던 우석훈은 평소와 다른 최루탄 소리에 놀라 학교 안 분수대까지 달려가 몸을 피했다. 분수대 옆 잔디에 누워 숨을 고르던 도중 누군가 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게 길었던 한 달의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우석훈과 친구들은 전경으로부터 쓰러진 한열을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실 앞을 떠나지 않았 다.
    “대학교 2학년 땐데, 10미터쯤 됐을 거예요. 앞에 있던 친구가 죽었죠 거기서. 그때는 그게 오래갈 기억일지 사실은 몰랐어요.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됐는데도 문득문득 한열이가 쓰러졌던 그때 ‘누군가 쓰러졌다’ 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던 그 자리로 가있는 기분이 들고는 해요. 그 사건은 이제 제 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고 제 삶의 한 부분인 것 같아요” - 우석훈 인터뷰 중

    776회 2018-05-28

    누운 배, 94일의 기록 ■ 기획의도
    2018년 5월 10일 오전 9시 누운 배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다 속으로 가라 앉은지 1,486일만이었다.
    2017년 10월 27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선체 직립 추진' 안건을 의결했 다. 목포 신항에 거치된 지 6개월만의 결정이었다. 초기에 당국은 객실 부위를 절단 해 직립시킨 후 조사하는 방식을 검토했지만, 미수습자 유골 유실, 선체 변형 위험, 진상규명 근거 훼손 등 반대 여론은 거셌다. 누운 배로부터 네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고 위험했다. 미수습자 수색과 침몰 원 인에 대한 선체조사가 다시 벽에 부딪혔다. 배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더는 앞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눈과 귀가 한데 모아졌던 5월 10일 누운 배가 다시 일어난 그날의 기록이자, 배를 일으키기 위해 분투했던 94일간의 땀과 이날이 있기까지 4년을 버텨 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주요내용
    ⓵ 4만 8천톤 크레인이 1만 4천톤 배를 일으켜 세우는 지상최대의 작전
    “울산에서 목포까지 232킬로미터를 19,400마리의 말이 3박 4일 동안 끌고 갑니다.” - 1만톤 해상크레인 선장 강희복
    5월 1일 울산 현대 중공업 앞 바다에 국내 최대 규모인 1만 톤급 해상 크레인이 출항 했다. 길이 182M, 폭 70M, 무게 48,874톤에 달하는 세계최대 크레인 중 한 대. 크레인의 목적지는 목포 신항. 바다가 허락한다면 5월 5일 아침에는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그곳에는 1만 4천톤으로 추정되는 ‘누운 배’가 기다리고 있다. 5월 5일 오후. 목포 신항 앞바다에 1만 톤 크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레인의 거대한 양팔에는 256줄의 와이어가 달려있다. 이 와이어를 배와 연결해 90 도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선체를 일으킬 것이다. 파도와 바람까지 도와주어야 가능 한 작전이다.
    ⓶ 1만 7500명의 기술자들
    “여기가 작년 4월 21일에 가장 먼저 수색했던 곳인데 뻘이 3, 4미터 차 있었어요. 그 걸 사람 힘으로 수습해서 여기 협착부만 남았는데 눈앞에 교복이 있는데도 사람 힘 으로 꺼낼 수가 없어요” - 오승래 선체조사위원회 조사관
    A데크 좌현 남학생 객실, 천장이 45도 밀고 들어와 바닥과 협착되어 있었고 그 사이 에 체크무늬가 선명한 교복이 끼어 있었다. 어느 부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죽은 자식의 물건, 일 년이 지나도록 주인을 찾아 줄 수가 없었다.
    “기관구역에서 지난해 10월 미수습자 유해가 발견되었어요. 와류현상에 의해 미수습 자 유해가 쓸려 내려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정일 선체조사위원회 사무처장
    돌아오지 못한 다섯 명이 배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기관구역에 대한 수색 역시 배를 세우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다.
    세월호 직립은 세단계로 진행되었다. 바다와 90도로 누워있던 배를, 바다와 평행을 이루도록 돌려 뉘우고, 직립을 하기 위해 구조보강작업을 하고, 1만 톤 크레인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다. 2월 21일 배가 바다를 향해 돌아누웠다. 선체 인양 이후에는 내부 수색과 선체 보존 을 위해, 이동 후에는 직립 시 외부 충격 완화를 위해 2,950톤의 철제빔이 동원된 보 강작업이 이루어졌고 하루 평균 185명, 연인원 1만 7500명의 기술자들이 동원되었 다.
    “작업장으로 출근하는 아침마다 (입구에 전시된 세월호 아이들) 사진을 봐요. 그러 면 가슴이 먹먹하고.. 그 사진을 보면서 별이 돼 버렸다, 별이 되었다 그 말이 왜 그 렇게 마음에 와 닿던지.” - 최태욱 반장 (건조1부)
    “우리는 항시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분들(유족들)은 항시 웃고 다니시 더라고. 그래서 ‘저분들은 뭐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들의 웃음은 바로 눈물 이었다는 것을 인자 와서 조금씩 느끼는 것 같습니다.” - 박현재 기원 (건조1부)
    “부모님들의 그 마음은 누구도 얘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분들에 게 조금이나 보탬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상은 현장소장
    ⓷ 영점의 회복
    “아들이 사진으로 왔잖아요. 진짜 우리 아들이 와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집에 못 온 이유는 내가 알아야 하잖아” - 건우(단원고 2학년 5반) 엄마
    선체 직립이 진행되는 동안 세월호는 4주기를 맞았고, 합동분향소가 문을 닫았다. 아 이들의 영정사진과 소지품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건우의 영정사진도 집으로 돌아왔 다. 건우 방에는 건우가 쓰던 드럼과 베이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건우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100만원이 넘는 드럼을, 40만원이라고 둘러대서 사주었 던 건우 아빠는 그동안 혼잣말이 늘었다.
    “이제 목포를 가거나 어디를 가거나 가면서 그냥 혼잣말로 얘기하고 가요. 뭐 야, 건 우야, 아빠 지금 화장실 가고 싶은데 다음 휴게소 들릴까? 아니, 들리는 김에 밥이나 먹자. 넌 뭐 먹고 싶냐? 그런 얘기도 하고... 왜, 자식은 마음에 담는다고 가슴에 담는 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가슴에 담기조차도 미안해서 아직까지는.” - 건우 아빠
    5월 10일 오후 12시 10분, 세월호가 다시 섰다. 새벽 두시부터 일어나 바다 상황을 체크했던 크레인 선장의 굳은 어깨가 풀어졌고 하얗게 침이 말라 붙은 현장소장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유가족들의 젖은 눈꼬리에도 주름이 잡혔다.
    네 번의 봄이 지나고 세월호가 다시 섰다. 건우엄마가 말했다.
    “우리는 울면 안돼. 이제 시작이야”
    바로 선 세월호 안에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775회 2018-04-26

    남북정상회담 특집 다큐 <테이블 너머의 김정은> 남북정상회담 D-1. 불과 작년, 핵 실험으로 얼어붙었던 겨울을 지나 평화의 희망이 싹트는 2018년 한반도의 봄. 11년 만에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다. 한반도 의 평화를 위해 가장 가까이 마주 앉아야 할 김정은. 그런데 우리는 김정은과 북한 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고모부와 형도 죽이는 광기어린 독 재자? 핵무기를 등에 업고 세계를 위협하는 ‘꼬마 로켓맨’? 특집 다큐 ‘테이블 너머 의 김정은’에선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김정은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 다. 이를 위해 중국, 스위스를 긴급 취재하고 북한의 최근 모습을 공개한다.
    중국 : 김정은의 달라진 행보
    북경의 교통이 통제됐던 지난 3월 26일.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김정은과 시진핑. 예 상치 못했던 중국 방문으로 남한과 미국, 중국까지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인 김정은. 제작진은 성대한 의전 속에 이루어진 김정은의 중국 방문 동선을 직접 따라가면서 그가 중국을 방문한 진의를 분석해본다. 지금의 대화 분위기가 대북제재로 얼어붙 은 북중 접경지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단둥 현지에서 듣는 생생한 이야 기까지. 은둔의 정치를 끝내고 연이은 국제 행보로 외교 무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김정은, 그의 달라진 행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위스 : 김정은 그는 누구인가?
    지난 1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대비해 남북 선수단이 공동 훈련을 했던 마식령 스키장. 김정은이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는 마식령 스키장과 스위스 유학 생활에는 어떤 연관 성이 있을까. 박운이라는 가명과 외교관 아들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동생 김여정과 4 년여의 스위스 유학 생활을 했던 김정은. 스위스 현지에서 만난 김정은의 동창은 아 직도 그를 농구를 좋아하는 친절하고 평범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유학생 들과 다를 것 없던 10대 소년은 북한으로 돌아가 어떤 마음으로 북한 사회를 바라보 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을까.
    북한 : 김정은 집권 7년, 북한의 현재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 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김정은이 외 친 약속은 과연 지켜지고 있을까. 북한에 다녀온 재미 언론인의 영상을 입수해 확인 해 보았다. 형형색색의 고층 건물과 자유롭게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 고층 아 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모습에 우리가 알던 북한은 없다. 개혁 개방으로 사실상 시장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김정은 체제. 장마당과 돈주가 이끌고 있다는 지난 7년간의 북 한 경제 변화상에 대해 짚어 본다. 단둥에서 만난 북한 무역상의 “장사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일까.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통해 거머쥔 협상력으 로 천명한 경제 노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2018. 04. 27. 새로운 역사의 시작!
    회담을 일주일 남기고 핵 실험장 폐기를 선언한 김정은. 전에 보지 못한 속도와 방향 으로 성큼성큼 우리 앞에 다가선 김정은과 미・중 사이에서 끝까지 운전대를 놓을 수 없는 우리 정부. 이제는 김정은과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냉철히 판 단하고 과감히 나아갈 때.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한반도 평 화 정착으로 가는 성공적인 발걸음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