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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차 방송일 내용
    295회 2018-12-11

    못생긴 아빠, 집으로 10년 - 개그맨 오지헌 못생긴 개그맨 오지헌, 10년전 방송을 접고 아내와 세 딸에 올인하다
    2003년 혜성처럼 개그계에 등장한 오지헌(40). 내년이면 데뷔 17년차를 맞이하는 중 견 개그맨이다. “안녕? 난 민이라고 해~” 짧은 대사 한 마디와 트레이드 마크인 선 홍 빛 잇몸은 단숨에 오지헌의 이름을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정종철, 박준형 등과 함께 못생긴 개그맨의 대명사였던 오지헌은 2008년 mbc로 자 리를 옮겨 활동하던 중 동갑내기 아내 박상미씨를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아내가 임 신하자 결단을 내렸다. 개그맨으로서의 성공,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보다 힘들어하는 아내곁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10년. 오 지헌은 이제 세 딸의 아빠다.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육아는 아내 혼자 힘으 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루 24시간 아내와 함께 세 딸을 키우고 있는 오지헌. 지금 오지헌은 성공한 개그맨 이 되기보다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에너지가 100이 있다면, 일에 99퍼센트를 쓰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1퍼센트를 가정에 쓰는 사람이 있고... 그런데 저는 50대 50이라고 생각해요. 옛날에 개그맨으로서 거의 100프로를 살았다면 지금은 거의 90퍼센트를 아빠로서 사는 거죠. -오지헌 인터뷰 中-
    수영장 딸린 100평 집에서 살았던 부유한 어린시절, 그러나 부모의 이혼으로 가 정의 행복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다
    오지헌의 고향은 강남구 청담동. 어린시절 수영장이 딸린 100평 저택에서 살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유명 학원 강사였던 아버지는 너무나 바빠서 일년에 서너번 얼굴 을 볼까말까 했고, 결국 스무살 무렵 부모님은 이혼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나 행 복하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상처는 결국 오지헌을 집으로 불러들인 결정적 계기다.
    부모의 이혼 이후 아버지와 멀어졌던 관계는 결혼이후 회복됐다. 아버지는 지금도 좀더 열심히 일해서 가장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오지헌은 간간히 방송 일과 행사, 공연을 하며 모든 스케줄을 아내와 세 딸의 시간표에 맞춰놓고 있다.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니는 세 딸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사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 는 대신 큰 딸의 숙제를 봐주고, 매일 저녁과 목욕시키고 머리를 말려주는 일까지. 아빠 오지헌은 숨돌릴 틈 없이 바쁘다. 의젓하고 똑부러진 맏딸 희엘(10)과 긍정의 아이콘인 둘째딸 유엘(7),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사고뭉치 막내딸 벧엘(4)까지. 세 자매로 인해 하루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유쾌한 오지헌의 집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 다에서 만나본다.
    경제적으로 어렸을 때 부유했는데,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다 보니... 저는 그거에 대해서 많이 꿈 꿨던 것 같아요. 좋은 가정? 돈이 좀 없더라도 부부끼리 사이가 좋은 가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오지헌 인터뷰 中-
    길었던 공백기,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 최소한의 생활비로도 행복한 오지헌식 ‘짠 욜로 라이프’ 전격 공개
    한때 개그맨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오지헌. 육아에 전념했던 지난 10년 사이 오지헌은 대중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때 오지헌을 지탱해준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해주 는 아내 박상미 씨와 천사 같은 세 딸들과 함께 오지헌은 ‘짠 욜로 라이프’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보다 싸게, 보다 즐겁게. 아이들의 옷은 선배 개그맨 정종철네 집에서 얻어오고, 아 이들 장난감은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만 사 준다. 그렇다고 마냥 절약하는 것만은 아니다.제주도 왕복 9900원 짜리 항공권으로 여행을 다닐 정도로 노하우가 쌓여가고 있다.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오지헌. 절약하는 삶은 힘들지 않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 낼 수 있는 지금에 감사한다. 때로는 가장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 금처럼 화목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한다. 오는 12월 11일(화) <휴 먼 다큐-사람이 좋다>에서는 멋진 아빠 오지헌과 천사 같은 세 딸들의 행복한 집을 찾아볼 수 있다.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사람이 살면서 분명히 이뤄야 할 일이에요.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노력을 해야 해요. 지금 전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이 시간이 결코 헛되다고 생각지 않아요. -오지헌 인터뷰 中-

    294회 2018-12-04

    나와 아빠 – 가수 조정민 ▶ 소녀가장이 된 ‘음대여신’, 트로트를 만나다.
    호소력 짙은 가창력과 빼어난 외모로 트로트계에 입지를 넓히고 있는 가수 조정민 (33세). 음대 출신이란 장점을 살려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트로트 가수’로 가요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어릴 적부터 가수를 꿈꿨던 조정민이지만, ‘트로트’를 택한 건 운명이었다. 조정민이 음대 재학 중이던 2007년,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 충격으 로 고통스러워하던 아버지는 이듬해 2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평 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어머니와 어린 두 남동생까지 네 가족의 생계가 현실로 다가 왔다. 가수라는 꿈도 학교도 사치로 느껴졌던 조정민. 휴학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피아노 레슨, 카페 피아노 연주, 설거지에 청소까지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때, 조정민에 다가온 것이 바로 ‘트로트’였다. 대학 축제에서 조정민의 노래를 들었던 트로트 제작자가 때마침 조정민에게 연락 을 해왔다. 당시 가요계에 불던 ‘장윤정 신드롬’에 힘입어 집안을 일으키려 했던 조 정 민. 하지만 가요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2009년 데뷔곡 ‘점점점’을 발표, 전국 재 래 시장을 돌며 노래를 홍보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대중의 외면을 받고 6개월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가수의 길은 포기할 수 없었던 조정민. 피아노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마다 올리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희 망을 담아 올렸던 영상은 기적처럼 방송 제작자의 눈에 띄었다. 2014년, 트로트 경 연 프로그램 ‘트로트 엑스’를 통해 화려하게 귀환한 조정민. 한 때, 어쩔 수 없는 선 택 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운명이 돼버린 ‘트로트’로 그녀 인생에 반전이 시작됐다.
    스물두 살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어요. 가정이 갑자기 기울어지면서 저는 가장이 되었어요. 갑자기 책임감을 안게 되었는데 처음에 막 믿어지지 않고, 가족들은 다 암울하고, 저한테 꿈이라는 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학교도 휴학하게 되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의 처절함을 그때 깨달았어요.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받다가 제가 생활비를 벌어서 써야만 하는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뭔가 나 혼자 사는 힘든 인생을 나 혼자 사는 것 같다. 그런 생각도 들고, 정말, 살기 싫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조정민 협성고등학교 강연 int 중-

    저 영상 좀 찍어 달라고, 그래서 제가 카메라를 집에 있는 안 좋은 거지만 그걸로 찍어 달라고 해서 그때 한참 인터넷이 막 발달 되어있었고 그때 유튜브는 사실 유명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나 혼자 뭔가 만족을 느끼기 위한 그런 거로 커버 곡을 만들어서... 성시경 ‘두 사람’을 딱 제가 딱 연주하는 걸 보고 엠넷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 당시 ‘트로트 엑스’라는 프로그램을... -조정민 int 중-
    ▶ 불러만 주세요! 어디든 달려가는 ‘열정 부자’ 남매의 연예계 정복기!
    조정민의 가장 큰 버팀목은 매니저이자 친동생인 조현석(31세) 씨다. 2년 전, 소속 사 대표를 찾아가 누나의 매니저를 자청했다는 동생 현석 씨. 일정 관리부터, 무대 의상 쇼핑, 출연 프로그램 모니터링에 자칭 ‘무플 방지 위원회’까지 맡으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누나의 연예계 활동을 돕고 있다. 한 땐, 가수를 꿈꾸는 누나가 철없이 느껴졌다는 동생 현석 씨. 그런 동생의 생각 을 바꾼 건 꿈을 향한 조정민의 끈기와 열정이었다. 매니저가 되어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가장 역할을 하는 누나를 도와 가족에게 보탬이 되기로 마음먹은 현석 씨. 이제 동생은 조정민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누나가 쉬면 자신이 더 불안하다 며 언제나 조정민을 채찍질하는 스파르타 매니저 현석 씨. 평생 삼 남매를 키우시느 라 고생한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조정민 남매. 열정 한가 득 담긴 두 남매의 유쾌한 일상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최초 공개한다.
    지금 집이 되게 사실은 먹고 살 궁리해야 하는데 그럴 때 자기 꿈을, 자기 꿈만 이렇게 향해서 나가는 게 되게 조금 약간 이기적으로 보였어요. 가족들은 생각 하나도 안 하는 건가 약간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가수가 되는 게 말은 쉬운데 과정이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보통의 경우는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처음에는 되게 약간 부정적으로 바라봤었어요.
    누나도 되게 옆에서 지켜 주고 싶고, 제가 같이 있으면서 재밌는 이야기도 같이 나누고, 더 힘을 준다고 해야되나, 제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누나 일을 대표님께 누나 일을 제가 해도 되겠냐고, 제가 부탁 드렸었거든요. -조정민 동생 조현석씨 int 중-

    ▶ 한국 가수 조정민, 일본 ‘엔카’의 중심에서 재일조선인 위한 노래 부르다
    2018년 1월 오사카 쇼케이스로 일본 활동을 시작한 조정민. 노래 제목은 ‘아빠’, 첫 일본 데뷔곡임에도 제목이 한국어다. 고국을 떠난 딸이 아버지와 고향을 그리워하 는 내용이 담겨있다. 가장 먼저 노래에 반응한 이들은 오사카의 재일조선인들이었 다. 재일조선인 2세 정조자(78세) 할머니는 조정민의 1호 팬이다. 조정민의 데뷔곡 ‘아 빠’를 들으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할머니. 정조자 씨의 아버지는 일제 강 점기 시절 경상북도 구미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한평생 조선 땅을 그리워하며 살았 던 재일조선인 1세다. 일본과 북한의 정치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가장 먼저 혐한 시위의 표적이 되는 재일조선인. 이들은 일본에서 선거권을 인정받지 못한 채 ‘특별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 일본 우익들의 탄압과 정치적 차별 속에서도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조선 학교에서 조선말을 배우며 살아간다. 정조자 할머 니 가족과 만남으로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 조정민. 지난 10월, 조정민은 ‘엔카’의 성지이자 ‘혐한’의 중심이라고도 불리는 오사카 최대 축제 ‘도톤보리 리버 페스티벌’에서 당당하게 데뷔곡 ‘아빠’를 불렀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조정민. 이제는 팬과 가수를 넘어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 고 있는 조정민과 재일조선인 가족의 특별한 우정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담아본다.
    큰 이유는 없고 조선 사람으로 살아온 긍지?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고향이 아닌 여기로 와서 고생을 하시는 것이. 왜 내가 일본 사람이 되어야 하냐는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손자도 치마저고리 입어서 고등학교 가고 있습니다. 일본 아이들이 조선 학교, 조선인, 자기 고향 가라고 하면서 다 뭐 칼로 해서 치마저고리 자른 적이 많이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2세 정조자 할머니 int 중-

    선조들이 살고 계신 고향 땅은 조선 반도잖아요. 그때 1세 분들이 건너왔을 적에는 조선 반도였잖아요. 한국도 북한도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건너 온 사람. 건너온 1세 분들은 다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조선 반도에서 건너 왔다가. 조선 사람으로 사는 걸, 여권도 다 조선 그것이 원래 이유잖아요. -재일조선인 3세 조기미씨 int 중 -

    293회 2018-11-27

    선물같은 인생-배우 이주실 ■ 유방암 4기를 이겨낸 ‘국민 엄마’ 배우 이주실의 암 투병기 고백!
    “원체 강하니까, 산 넘고 물 넘고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까 이겨낼 것이다. 그리 고 애들 때문에 아마 강하게 마음먹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죠.” - 명창 신영희 인터 뷰 中
    배우로선 탄탄대로를 걸어왔지만, 여자로서 삶은 순탄치 못했던 데뷔 54년차 원로 배우 이주실(75세). 1986년, 마흔 셋 이른 나이에 남편과 헤어지고 두 딸을 홀로 키 웠 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에 부모 역할까지, 홀로 감당하기 모진 세월이었다는 데...1993년 그녀 나이 쉰이 되던 해, 예상치 못한 병마까지 찾아들었다. 유방암 4 기. 발병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암세포가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가 된 절망스러운 상태 였다. 살 수 있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이 투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과 죽어가는 모습을 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이혼이라는 어려움을 겪은 딸들에 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는 생각에 결국, 딸들을 캐나다에 사는 동생에게 억지로 떼 어놓았다.

    “어느 날 갑자기 늘 붙어서 있었는데 세상 떠났다. 그때는 늦다. 작별의 시간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냥 떠밀어서 아이들을 제 친정 동생한테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미안한 정도가 아니라 상처죠.” - 배우 이주실 인터뷰 中
    장롱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그녀의 일기에는 당시 딸들을 향한 시한부 엄마의 고뇌 와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데...오래돼 빛바랜 일기를 꺼내 들고 눈물짓는 이 유는 무엇일까. 가족이 헤어져 있던 시간은 무려 13년. 그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재발 을 거듭하는 암과 사투를 벌였다. 계속된 치료 속에 체중이 30kg로 줄고, 한쪽 가슴 절제 수술까지 해야만 했다. 차라리 삶을 포기하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투병이 계속됐지만, 그녀는 기어이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 달라’는 딸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켰다, 결국 2010년 두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비밀 일기 속에 담겨있던 모녀의 이별 이야기가 공개된다.

    ■ 혼자 사는 엄마와 혼자 사는 딸, 서로 품어줄 수 없을까?
    첫째 딸 이도란(48세)과 동묘 벼룩시장 데이트하기. 요즘 배우 이주실이 가장 즐거 워하는 일이다. 둘째 딸 이단비(33세)는 해외에 거주해 자주 볼 수 없어, 동생 몫까 지 딸 노릇을 해야 하는 큰 딸 도란. 엄마에게서 독립해 홀로 사는 딸, 그리고 그 딸 을 바라보며 혼자 사는 엄마...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어 엄마 곁으로 돌아온 큰딸은 친구처럼 지내기는 하지만, 부모의 이혼을 받은 상처와 엄마의 암 투병으로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긴 만큼 모녀의 생활 방식 차이는 쉽게 좁혀지질 않았다. 특히 엄마의 손맛을 아직까지 낯설어한다는 딸. 엄마 이주실은 딸이 아직까지 미혼인 채로 일만 하며 사는 게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며칠 전, 엄마 이주실은 큰딸 도란과 함께 전남 영광군으로 여행을 떠났다. 영광군 의 법성포는 그녀가 암 투병 당시 가장 고통이 심할 때 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머 물던 곳이자, 기적처럼 암을 이겨낸 뜻깊은 곳이다. 이날 이주실은 딸에게 그동안 단 한 번도 직접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 속 미안함을 꺼내놓는데...과연 딸 도란의 반 응은? 오랜 이별 탓에 서로 사랑하지만 완전히 품어주지 못했던 두 모녀의 여행을 < 휴먼다큐-사람이 좋다>가 따라가 본다.

    ■ 암 투병과 극복까지가 인생 1막, 그 이후 삶을 연기하는 지금이 인생 제 2막!
    “연극에서는 정말 알아주는 배우였어요. 대선배, 그러니까 연극계의 거물이나 마 찬가지였죠.” - 배우 남능미 인터뷰 中
    “연기에 대해서 아주 집념이 있는 사람이에요. 다양한 색깔을 잘 표출하는 분이 죠.” - 배우 최주봉 인터뷰 中


    최근 충무로와 방송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민 엄마’ 배우 이주실. <부산행>, <약 장 수>, <엄마의 공책> 등에서 공유, 김인권, 이종혁 등 총 16명의 아들을 뒀다고, 특 히 <엄마의 공책>에서 치매에 걸린 엄마의 모성애 연기로 많은 사람들을 가슴 뭉클 하게 만들기도 했다. 3기 말이었던 암 투병에서 극복을 통해 죽음의 경계까지 경험 한 그녀는 진짜 삶을 연기하게 됐고, 이제 국내 뿐만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녀의 행보 를 주시하고 있다. 지난 10월 11일부터 3일간 개최됐던 교토 국제영화제에 개막식 특 별 손님으로 초대를 받은 것. 그녀의 나이 일흔 다섯, 연기 인생 제 2막을 지금부터 펼쳐 보이겠다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딸들을 향한 가슴 속 깊이 숨기고 있었던 이야기를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292회 2018-11-20

    육각수로 산다는 건, 가수 조성환
    춤은 나의 인생, 소리꾼 이희문
    ■ ‘흥보가 기가 막혀~’ 전설의 히트곡을 남기고 사라진 육각수의 사연은?
    1995년 MBC 강변가요제에 등장해 ‘흥보가 기가 막혀~’ 를 외치며 국민들에게 강 렬 한 인상을 남겼던 남성 듀오 육각수. 중독성 있는 후렴구로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들 은 일약 스타덤에 올라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서태지와 아이들’과 겨루기도 하며 활 발하게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 때도 잠시, 멤버 조성환(44세)의 군 입대 문제로 육 각수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같은 멤버였던 도민호는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육각수는 점차 대중들에게서 잊혀졌다. 돌아온 후에 그가 설 곳은 없었다.
    “하는 족족 망했어요.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랬죠. 그때부터 이제 완전히 바닥으로 간 거죠.” - 육각수 조성환 인터뷰 中
    당당히 홀로서기를 시작했지만 사업 실패, 음반 실패 등 계속되는 실패로 수렁에 빠 진 조성환. 그는 어머니의 눈물 어린 애원과 걱정에 실업자 교육을 받은 후 공장에 취직해 새 삶을 시작했지만 결국 음악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또 다시 음악을 시작한 조성환은 멤버 도민호와 다시 뭉쳐 재기해보려고 했으나 도민호의 건강 악화로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작년 10월 멤버 도민호가 간경화로 세상 을 완전히 떠나고, 육각수라는 이름을 혼자 짊어지게 된 조성환. 가족 같은 멤버를 잃은 상실감마저 더해져 결국 우울증까지 앓게 됐다.
    “그때 당시에 우울증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저조차도 완전히 폐인이 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으로 저도 좀 정신을 차리려고 했죠.” - 육각수 조성환 인터뷰 中
    그랬던 그의 인생에 운명처럼 나타난 한줄기의 빛. 바로 여자 친구 태혜령이다. 앞 서 한 번의 결혼 실패 경험이 있는 두 사람. 같은 아픔을 가졌기에 서로를 더욱 잘 이 해하고 보듬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태혜령에게는 다 큰 딸이 있지만 조성 환이 차츰 딸과의 거리를 좁히며 세 사람은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기적처럼 나타나준 여자 친구와 함께 긍정적인 에너지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조성환 은 다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강연과 디제잉, 라디오 등 스케줄을 소화하 며 잊지 않고 찾아주는 곳이 있어 행복하다는 조성환. 현재는 여자 친구를 향한 마음 을 담은 음원 발표를 앞두고 있다.
    “믿음직한 친구이자 가족 같아요.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되게 좋아요.” - 육각수 조성환 여자 친구 태혜령 인터뷰 中
    “평범하게 음악 생활을 꾸준히 하면서 여자 친구랑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 저는 지금 되게 행복하다니까요.” - 육각수 조성환 인터뷰 中
    단 하나의 히트곡만을 남긴 채 사라졌던 육각수의 기가 막힌 운명과 시련을 극복하 고 만난 사랑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함께할 수 있다.
    ■ 가발 쓰고 힐을 신고 춤추는 남자 소리꾼, 이희문!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남자 소리꾼 이희문(43세)는 국악계가 알 아주는 괴짜이다. 한복을 입고 갓을 쓰는 대신 짧은 반바지를 입고 긴 가발을 쓴 채 춤을 추며 구성진 가락을 들려주는 이희문. 독특한 차림새의 만큼이나 그의 음악 세 계 또한 다양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은 2017년 결성한 민요락 밴드 ‘씽씽’이 미국 공영방송 NPR에 초청 받아 했던 공연이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백만 뷰를 넘게 기록하면서부터였다. 올해 3월에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OST ‘그 사나이’를 불러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내는 물론 해외 공연을 다니며 바쁘게 우리 소리를 알리고 있다.
    이희문이 남다른 재능과 넘치는 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어 머니인데,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소리로 명성을 떨쳤던 고주랑 명창이다. 그러나 기 생 소리를 들으며 소리를 했던 탓에 아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싶지 않았던 고주랑 명창. 처음에는 반대를 했으나 소리에 대한 이희문의 열정과 타고난 재능을 보면서 결국 고주랑 명창 또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함께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할 만큼 그의 든든한 지원자가 된 그의 어머니. 이희문 또한 어머니의 소리 인생을 재연한 공 연을 선보이는 등 끊임없는 시도와 발전으로 기대에 보답하고 있다.
    “남들은 10년을 가르쳐도 안 되는데 배움에 있어서 빠르고, 목에 애원성도 있고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자기가 워낙 좋아하니까 밀어줘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 이희문 어머니 고주랑 명창 인터뷰 中
    “정말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 국악인 박애리 인터뷰 中
    “(이희문의) 소리 속에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이희문만 갖고 있는 우리의 소리 속이 있다는 거죠.” - 국악인 김영임 인터뷰 中
    우리 소리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소리꾼 이희문과 그 의 든든한 지원자인 어머니, 고주랑 명창의 특별한 동행을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291회 2018-11-13

    지지 않는 별이 되다 - 배우 故 강신성일 편 █ 배우 故 강신성일 그가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긴 말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故 강신성일. 한국 영화의 상 징 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대배우 故 강신성일이 11월 4일 돌연 별세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 故 강신성일의 둘째 딸 강수화 씨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 기 전, 아버지의 투병 생활에 대해 털어 놓았다. 병세가 악화돼 옮긴 광주의 한 병원 에서 그는, 통증이 너무 심해져 이렇게 누워도 아프고 저렇게 누워도 아픈 상황에서 진통제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항상 영화를 생각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故 강신성일에게 병들고 근육이 빠져 버린 몸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병원에 문병을 와서 발을 씻 겨 주겠다는 엄앵란의 말에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故 강신성일. 그 이유는 바로 언제 나 건강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였기에 노랗게 황달 끼가 온 몸을 보이기 싫어 서였다. 게다가, 발톱도 깎지 못한 채 앙상한 병자의 발은 보는 이마저 마음이 아플 정도라고 전했다.
    “아버지의 발을 봤더니 발톱도 못 깎고 살도 하나도 없고, 정말 병자의 발이었어요. 몸에 노랗게 황달기가 오더래요.” - 딸 강수화 인터뷰 中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자,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인생을 살다 떠난 한국 영화계의 거성 故 강신성일의 마지막 폐암 투병 생활과, 가족들에게 마지막으 로 남긴 말이 <휴먼다큐-사람이 좋다>를 통해 공개된다.
    █ 타계 4주 전, 부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故 강신성일의 미공개 영상 단 단독 공 개!
    1964년 제 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 등 시상식에서 수상한 故 강신성일.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식 행사인 2018 부산국제영화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휴먼다큐–사람이 좋 다>에 서 최초 공개한다.
    “근육이 빠지고 아프다는 게 저로서는 굉장히 화가 났어요.” - 故 강신성일 인터뷰 中
    부산 호텔에서 만난 故 강신성일의 모습은 레드 카펫 위에서처럼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명의 간호사를 대동한 채 양 팔에 진통제를 맞고, 목까지 전이된 암 세 포 때문에 목 보호대를 착용해야 하는 병약한 모습이었다. 그가 몸이 힘든 상태임에 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것은, 이장호 감독과 약속한 내년 크랭크인 예정인 영 화 ‘소확행’에 대한 애정과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가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죽을 때 까지 자기는 영화인이라 그랬거든요. 그래서 돌아가실 때도 필름을 맞춘다고 하시다가 돌아 가셨어요.” - 엄앵란 인터뷰 中
    동행 취재 당시 故 강신성일은 자신이 기르던 개가 2개월 전 사망한 것이 주변 사 람 들에게 회자되다가 개가 죽었다는 것은 빠지고 ‘신성일이 투병 중에 사망했다’는 소 문이 났다는 것. 요양을 위해 영천 집을 비워 둔 사이 발생 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 다. 한국 영화계의 거성, 故 강신성일이 타계 3주 전에 보인 진솔한 모습과 영화에 대 한 열정을 들여다본다.
    █ 가족들의 솔직 고백! 엄앵란과 딸이 말하는 나의 남편 강신성일, 나 의 아 아버 지 강신성일
    1960년 배우 엄앵란이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본 신성일의 첫인상 은 ‘멋있다’였다. 1964년에 개봉한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배신’을 통해 연인이 된 두 사 람은 같은 해 11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엄앵란은 영화 ‘맨발의 청춘’에 출연한 젊은 신성일을 보면 8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참 잘 생기고 싱싱했다’고 감탄한다. 특 히, ‘깡패 역할의 액션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엄앵란은 여전히 故 강신성일에 대 한 애정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엄앵란에게 남편 신성일은 ‘집안에서 볼 수 없는 대 문 밖의 남편’이었다.
    “자서전을 썼을 때도 그것만 빼고 얘기 하라고 했는데 앞, 뒤 다 빼고 그 인터뷰만 나간 거예요. 대한민국이 뒤집혀서 어머니랑 저랑 3개월 동안 밖에 못 나갔어요. 사람들이 손가락질해서.” -딸 강수화 인터뷰 中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별거는 오래되고 유명했고, 신성일은 2011년 출간한 그의 자서전에서 본인의 혼외 로맨스를 솔직하게 털어놓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일까,.. 故 강신성일의 사망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하나가 ‘부인 엄앵란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전해라’였다고 한다. 한편 딸 강수화 씨에게 故 강신성일은 미워할 수 없는 든든한 아버지였다. 2016년 영천에 찾아 온 막내 딸의 발 젖는다며 80세 노년임에도 딸을 번쩍 업어 들고는 개울 을 넘었던 故 강신성일. 딸 강수화 씨는 개울가에서 자신을 업어 줬던 그런 아버지 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며, 평생 건강한 채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지 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 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전했다.
    “아빠가 울지 마, 별거 아니다. 나는 이겨 낼 거야. 이러시는 거예요. 나는 영화 찍다가 세 번이나 죽을 뻔 한 고비도 넘긴 사람이야. 별거 아니야. 내가 이겨낼 거야. 내가 기적을 이뤄낼 거야. 그러셨거든요.” - 딸 강수화 인터뷰 中
    한국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이자 청춘의 아이콘이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 할 수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故 강신성일과 그 가족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 기를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