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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순

    회차 방송일 내용
    289회 2018-10-09

    오빠가 돌아왔다! 트로트가수 박현빈 박현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수억 원 빚 때문에 단칸방 생활, 죽음을 넘나든 2년 전 교통사고
    대한민국 ‘젊은 트로트’ 열풍의 주역, 가수 박현빈(37세). 2006년, 25세의 젊은 나 이에 ‘빠라빠빠’로 데뷔, 1달 만에 성인가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전 트로트계에 서 볼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이후 ‘곤드레만드레’, ‘오빠만 믿어’, ‘샤방 샤방’까지 내는 곡마다 ‘초대박’을 터뜨린 박현빈. 그러나 대중에게 알려진 화려한 성공과 달리, 데뷔 후 3년 동안 부모님과 형, 박현 빈까지 네 식구는 외가댁 단칸방에 얹혀살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사 업 실패로 얻게 된 가족의 수억 원대 빚 때문이었다. 거기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총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현빈. 다른 가수들이 하루 1~2개의 행사 무 대에 힘들어할 때, 독종이란 소릴 들으며 7~8개의 어마어마한 행사 스케줄을 소화 했던 박현빈. ‘깜지’처럼 빼곡히 채워진 스케줄에 따라 노래한 지 2년 반. 드디어 박 현빈은 수억에 달하는 가족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트로트 황태자, 박현빈의 원동 력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가족이 같이 다 살았죠. 누울 데가 없죠. 책상 밑이랑 피아노 밑이랑 이불을 게임하듯이 잘 맞춰서 깔면 깔리니까... 그 때만 해도 부부싸움도 자주 하셨고, 아버님은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집에 들어온 적이 단 하루도 없죠. - 박현빈 int 中 -
    (빚이) ‘제로’가 되는 날 제가 금액을 알고 있잖아요. 금액을 가지고 가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 모이시라고. 그것도 그 집이었어요. 계속. 장부를 정리하면서 거의 50년간 빚이 있고 이자를 내 오셨다고. 평생. 그 금액이 불었다 줄었다 일 뿐이지, 오늘부터 우리집안에는 지금 이 순간부터는 빚이 없습니다. 오늘부터는 빚이 없는 집안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다 우셨어요. - 박현빈 int 中 -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린 박현빈의 인생이 바뀐 건 2년 전 당한 교통사고 때문이 다. 지방 행사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행사 무대로 이동하던 도중 발생한 4중 추돌사 고. 잠깐의 여유도 없이 이어지던 무리한 스케줄이 원인이었다. 모든 일정이 ‘올 스 톱’됐다. 박현빈의 오른쪽 대퇴부와 정강이뼈가 산산 조각났다. 사고 당시 의식을 잃 지 않았던 탓에 눈만 감으면 그날이 끔찍한 기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잠에 서 깨면 사고 장면이 생각나 펑펑 운적도 많았다는 박현빈. 꾸준히 정신과 진료를 받 는 지금도 차를 타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장거리 이동은 기차를 탈 만큼 아 직도 박현빈은 끔찍한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가장 먼 저 떠오른 부모님의 얼굴, 그리고 가족들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는 박현빈. 절실하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진정으로 가족을 위하는 길 이 무엇인지 고민했다는 박현빈. 이제 욕심을 버리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 아버지한테 어디 병원으로 좀 와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좀 빨리 와 달라고, 그때 아니면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빨리 보고 싶어요. 와 주세요.”, “많이 다쳤니?”, “아니 그냥 다리 좀 다친 것 같은데요. 괜찮은데 이리 좀 와 주세요.”
    곧 수술 들어가고, 어디가 다친 지도 저도 모르니까, 가족을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걷지 못 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고, 지금 아픈 건 괜찮은데 그 공포감? 치료 후에도 오래 갔어요. 아주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 박현빈 int 中 -
    같은 아파트에 4대가 모여 사는 박현빈 家의 진하고 끈끈한 가족애
    경기도 광명의 명물 박현빈 가족! 조부모님, 부모님, 외삼촌네 식구들에 박현빈 부 부와 2살 아들 하준이까지 4대가 같은 아파트에 모여 사는 박현빈 집안은 남다른 가 족애를 자랑한다. 2년 전 교통사고 이후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다는 박현빈 부부는 특별한 선택을 했다. 바로 가족 모두와 같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독일에서 성악가로 활동하는 형님 내외의 한국 방문으로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자 리에 모였다. 음악 없인 못사는 별난 식구들답게 말 한마디에도 음악이 빠지지 않는 유쾌한 가족. 손주를 위해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어머니를 보니 어린 시절 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는 박현빈. 성공만을 좇던 삶을 잠시 멈추고, 가족과 보내 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집안일은 현빈이가 다 알아서 척척 알아서 하잖아요. 지금도, 뭔 일 있다. 집안에 뭔 일 있다하면 우리는 싹 모여요. 아주 그거 하나는 다른 집하고 좀 다를 거예요.
    우리 집은 전부다 음악 가족이에요. 음악 가족이 역시 굉장히 말하자면 명랑하고 재밌게 사는 것 같아요. 다 음악을 좋아하니까···. -할머니 인터뷰 中-
    최초 공개! 박현빈 부부의 아들 하준이 육아 일상
    2015년, 6년간 비밀 연애 끝에 한국 무용가 김주희 씨(33세)와 결혼에 골인한 박현 빈. 지난해, 두 사람 사이에 박현빈을 똑 닮은 아들 하준이(2살)가 태어났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아들 바보 박현빈의 반전 매력! 무대 위의 카리스마도 내려놓고 혀 짧은 소리로 하준이만 부르며 2살 아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 박현빈. 자신을 닮아 음악적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며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들 칭찬에 정신이 없다. 이제는 눈을 뜨면 아침 인사보다 하준이 침대를 먼저 살피는 남편이 조금은 서운하다는 아 내. 그러나 붕어빵처럼 닮은 남편과 아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난 다. 해외 공연을 위해 짐을 싸는 박현빈. 아빠와의 이별을 어떻게 알았는지 눈물을 글 썽이는 하준이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벌써부터 안절부절. 현관 앞에서 한바탕 눈물 바람으로 전쟁을 벌이는 이들 세 가족, 평범한 육아 일상을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에서 최초 공개한다.
    요즘에는 하준이한테 밀려난 것 같아요. 하준이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오빠가···. 신혼 때랑 하준이 태어났을 때랑 약간 달라요. 딱 자고 일어나면 신혼 때는 잘 잤어? 이게 되는데 지금은 하준이가 태어나고 나서 딱 뭐 일어나자마자 하준이 침대를 먼저 봐요. -박현빈 아내 int 中-

    288회 2018-10-02

    다시 꽃반지 끼고, 가수 은희 70년대 ‘사랑해’, ‘꽃반지 끼고’ 가수 은희, 활동 3년만에 갑자기 미국에 간 이 유는?
    ‘사랑해’, ‘꽃반지 끼고’, ‘등대지기’, ‘연가’ 등 시대를 넘어 세대를 넘어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사랑받았던 가수 은희. 1970년대 초반 18세 나이로 우연히 가요계에 발 을 디딘 은희는 맑은 음색과 청순한 외모로 등장하자마자 당시 최고 스타가 된다. 그 녀의 데뷔곡이었던 ‘사랑해’는 1972년 첫 번째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 남과 북 인사 들이 함께 합창을 했을 정도.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 용사들로부터 일주일에 한 가마 니씩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고. 그런데 은희가 가수로 활동한 것은 단 3년. 그 기간 동안 무려 37장의 레코드를 발 매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은희는 돌연 사라졌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사라 진 은희는 최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자신을 더 완성하고 싶었고, 이것이 연예계 활동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연예계를 떠난 은희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유명 패션 스쿨 FIT에서 공부를 마치고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한다.
    두 번의 사업 실패, 16년째 함평 폐교에서 사는 은희의 파란만장 오뚝이 인생
    당대 최정상을 달리던 가수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한 은희는 1985년 귀국, 다 시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고향 제주도의 갈옷에 영감을 받아 ‘코리아 브라운’ 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감물염색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은희의 사업은 쉽지 않았다. 제주에서 시작한 사업의 실패로 전 재산 7만원을 들고 은희는 서울로 올라 갔 다. 서울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며 다시 재기하는가 싶었지만 염색한 원단을 말리 기 위해 널어둔 섬진강에 갑작스러운 호우로 원단을 모두 잃으며 다시 실패하게 되 었다. 사업 실패 이후 그녀의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 천원. 외양간 옆 폐가를 수리해 살아야 했다. 실패의 과정은 은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후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일본 진출도 시도하며 전통 우리 옷의 재발견, 재해석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2002년 함 평 폐교로 이전, 작업실, 살림집, 각종 문화 공연장으로 개조했다. 이곳에서 16년째 햇빛과 바람과 이슬로 감물염색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천으로 옷과 모자, 구두를 만들고 있다. 최근 미국 진출까지 준비하는 중이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 것 을 알리기 위해 천연 염색 디자이너의 길을 걸은 지 30여 년. 원하면 도전하고, 도전 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은희의 오뚝이 인생을 만나본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인’ 남편과 자녀들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생각
    은희는 전남 함평에서 남편 김화성(66) 씨와 7천평의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본래 폐교였던 곳을 개조해 ‘민예학당’이라 이름 짓고 은희는 이곳에서 시 낭송, 연극, 패 션쇼, 음악회 등을 열고 청소년들을 위한 감물염색 체험장을 운영 중이다. 은희는 농 사도 짓는다. 웬만한 채소는 자급자족. 아침이면 뒷마당 닭장에서 달걀도 얻을 수 있 고, 마당의 감나무에는 벌써 감이 익었다. 은희의 자유로운 삶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 덕분. 미국에서 귀국 후 한 모임에서 남 편의 도사같은 외모에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고, 이후 김화성 씨가 사물놀이, 무농약 농사법을 가르치는 모습이 든든해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본래 한양공대 출신의 인재로 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학생운동을 했고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자 유인'의 삶을 택했던 인물이다. 또한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갖고 수련해 안동 하회탈 만들기, 활쏘기, 택견 등의 고수이기도 하다. 이런 범상치 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은희의 자녀들 또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은희는 두 아이의 고등학교 중퇴 에 동의했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봐야 한다는 것. 딸 키미는 현재 제주 도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며 작가의 길을 걷고 있고, 아들 ‘용’이는 인디밴드, 이종 격투기 등 미래 비전을 찾고있는 중이다. “인생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은희. 그녀는 어머 니 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돈과 명성보다 자유로운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2일 (화) 오후 8시 55분 <휴먼 다큐-사람이 좋다>에서는 자유인으로 자연친화적으로 살 아가는 은희 가족의 삶을 만나볼 수 있다.

    287회 2018-09-11

    아버지의 이름으로 - 가수 조관우 편 ■[방송 최초 공개] 신용불량자가 된 힘들었던 지난 날, 그의 눈물 어린 고백
    “생활고로 너무 힘든데 서로 감싸주지 못했죠 그러다보니까 3,4년 떨어져 있었고 부부로서는 이제 그때 이제 멀어진 것 같아요.” - 가수 조관우 인터뷰 中
    데뷔 24년차에 4회 연속 100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자타공인 90년대 대표 가수이자 ‘나는 가수다’의 레전드 가수였던 조관우. 2011년 성대 결절 수술 이후, 조 관우(54세)는 수입 없이 수개월을 생활했고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그의 재산을 관리하던 지인의 배신까지 겹쳐서 그는 십수억의 빚더미에 올라앉았 다. 버티려 노력했지만, 조관우 소유의 집 두 채가 모두 경매에 넘어가고 그는 빈털 터리가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현재 남은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인 조관 우. 하지만, 힘든 시기를 보내는 동안 재혼으로 어렵게 이룬 가정까지 깨지고 말았 다. 별거 3년 여 만에 현재 이혼 조정 기간 과정 중에 있다. 가정과 집을 모두 잃은 조관우는 4개월 전부터 큰아들 조휘(24세)의 월셋집으로 거 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외출도 삼가야 했고, 수 면제의 도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이다. 레전드 가수에서 급전직하 가정 과 집을 다 잃어버리게 된 조관우의 심경과 사연을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서 최 초 공개한다.
    ■ 네 아이의 아버지 조관우, 삭발한 이유는?
    “예전에 늪으로 활동 많이 하실 때 저는 팬으로서 바라 봤었고, 뵐 때마다 영광이죠. 소리에 대해 항상 연구를 하시기 때문에 존경하고 많이 배우려 하는 선배님입니다.” - 가수 정동하 인터뷰 中
    “성대 수술 후 전신마취로 보름동안 소리가 일체 안 나와요. 그 상황이 오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옛날 소리를 내기 위해서 확장하고 조이는 연습을 계속 했어요.” - 가수 조관우 인터뷰 中
    <늪>, <꽃밭에서> 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히트곡에 비해 얼굴 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데뷔 후 줄곧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했기 때문인데... 그가 신비주의를 벗게 된 계기는 바로 2011년 <나는 가수다> 출연을 통해서다. 하지만 그 후 조관우는 성대가 망가져 목소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수술을 받고 목소리는 겨우 돌아왔지만, 5옥타브를 넘나들던 특유의 가성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노래 밖 에 몰랐던 조관우는 절망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까지 했다고. 이런 힘든 과정 에서 장성한 두 아들 조휘(24세), 조현(21세)은 조관우를 지지해주는 기둥이자 삶의 원동력이 돼주었다. 두 아들은 뮤지션으로 성장해 2018년 조관우의 9집 정규 앨범 작 업을 도왔다. 조휘가 코러스와 피처링을 했고, 조현이 디렉팅을 도운 9집 앨범은 조 관우에게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 두 아들 이외에도 조관우에게는 두 번째 부인 사이에 아들(9세)과 딸을 두고 있다. 3-4년여 간 떨어져 있으며 6개월에 한번조차 보기 힘든 셋째 아들과 막내딸을 오랜 만에 만난 아빠 조관우. 아이들을 돌보는 게 힘들 법도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보는 내내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 어 미안하기만 하다고. 조관우 스스로 “그 동안은 하늘을 날아다녔다면 지금은 다시 땅바닥을 딛고 걸어가는 중”이라고 표현한다. 네 아이의 아버지 조관우는 아버지로 서, 가수로서 삶에 대한 의지를 굳게 하기 위해 최근 삭발까지 감행했다고 한다. 짧 은 머리로 10년 지기 친구 김태원, 영화사 관계자들 등을 만나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 는 조관우의 모습을 공개한다.
    ■ 1년만에 만난 조관우 아버지 명창 조통달과 어머니의 눈물!
    조관우는 한동안 자신이 처한 처지를 보이기가 두려워 부모님인 조통달 부부의 연락 을 일부러 피해왔다. 부친 조통달(74세)은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다. 일 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소리에 대한 열정으로 후배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고. 1년 여 만에 아들의 연락을 받아 전주에서 상경한 부모님은 아들 걱정에 마 음 고생이 심했던 만큼 보자마자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데...수고 많았다며 조관우를 안아주니 이내 그의 붉어진 눈시울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월세조차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어머니는 기어코 봉투까지 손에 들려 보냈다. 다시 내려가 면 손주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한 조통달 부부. 웃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지만 마음과는 달리 눈물이 앞선다. 눈물 가득한 조관우와 부모님의 재회 현 장을 담았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역경을 만난 레전드 가수 조관우가 그 역경을 헤쳐 나오기 위 해 노력하는 사연과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재기하기 위한 눈물어린 분투를 <휴먼다 큐-사람이좋다>에서 공개한다.

    286회 2018-09-04

    7남매의 장남으로 산다는 건 방송인 이상벽 ■ 실향민 7남매의 장남, 이상벽이 가족에게 선물한 제 2의 고향
    이상벽은 한국전쟁 중 일어난 1.4후퇴 당시 4살의 나이로 어린 여동생과 헤어져 이 산가족이 되었다. 고향과 여동생을 보지 못하고 남한에 정착하게 된 지도 68년이 흘 렀다. 긴 세월 고향도 없이 지낸 가족들을 위해 이남에서 마음 붙일 고향집을 선물하 고 싶었던 이상벽. 그는 지난겨울 충청남도 홍성군에 가족들을 위한 집을 마련했다. 이제 이상벽의 가족들은 명절에 찾아갈 고향집이 생긴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홍성 집에서 이상벽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아쉽 게 탈락하며 여동생과의 재회는 불발됐지만 가족들은 새로 생긴 고향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갈 데도 없고 맨날 그런 쓸쓸한 명절을 보냈는데 올해부터는 홍성 집을 마련하고부터는 이 집을 고향 집이라고 가정을 하고 올해부터는 모여서 같이 지내자고 했어요.” - 이상벽 인터뷰 中
    50년 동안 마이크를 잡고 살아온 사람 아니랄까봐 가족 모임에서도 MC를 자처하 는 이상벽. 송편을 빚는 동안, 그의 지휘 아래 네 명의 여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움 직인다. 그러나 71세의 베테랑 MC도 94세 어머니에겐 여전히 아이일 뿐! 이상벽은 어머니에게 송편 빚는 법을 배워 여동생들 틈에서 서툰 솜씨로 송편을 빚어냈다. 그 런가 하면 이상벽은 직접 윷판을 그리고 나무를 깎아 윷을 만들기 시작한다. 어머니 와 여동생들과 함께 직접 만든 윷으로 윷놀이를 즐기며 미리 명절 분위기를 만끽했 다.
    또한 추석을 앞두고 이상벽과 여동생들은 여주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이 상벽의 아버지는 18년 전, 담도암으로 7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큰 아들 이상 벽 에게 아버지이자 형이 되어주던 아버지.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상벽은 1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장남으로 서 무너져 있을 수 없었던 이상벽은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시 일어 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며 집안의 가장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병상에 계실 때도 ‘내가 떠나면 어떻게 살아갈 거냐.’물고 자문자답하듯이 ‘큰 애가 있으니까 뭐.’(라고 하셨어요.) 그게 어머니를 나한테 맡겨도 괜찮겠다는 믿음이겠죠.” - 이상벽 인터뷰 中
    이북에서 내려와 쓸쓸할 가족들을 보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빈자리를 채 우며 살아가고 있는 7남매의 장남 이상벽. 유쾌한 가족들의 명절나기와 제 2의 고향 집을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 94세 어머니를 모시는 71세 아들 이상벽의 사모곡
    6년 전, 이상벽은 큰 아들로서 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한 어 머니를 위해 고향 황해도 바다와 맞닿아 있는 인천에 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들의 동거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의 14층과 25 층에서 윗집, 아랫집 이웃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다 른 가족들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한 이상벽의 배려다. 또한 94세의 나이에도 아 이스커피를 즐겨 마시는 어머니를 위해 집 앞 카페에 매달 10만 원을 맡겨 놓는 이상 벽. 어머니가 언제든 편하게 와서 친구들과 커피를 즐기시도록 한 그만의 특별한 효 도방식이다. 71세의 아들 이상벽은 94세의 어머니가 남은여생 마음 편하고 좋아하 시 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나는 우리 엄마야말로 가장 든든한 언덕이에요.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든든해요.” - 이상벽 인터뷰 中
    고향과 딸을 그리워하면서도 7남매를 모두 무사히 키워낸 이상벽의 어머니. 94세가 된 어머니를 위한 71세 아들 이상벽만의 독특한 효도 방법을 MBC 휴먼다큐 <사람 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성실이 밑천이다!’ 자수성가 MC 이상벽!
    이상벽의 50년 방송 인생은 1968년, 세시봉 음악 감상실에서 우연한 기회에 마이크 를 잡게 된 후 시작되었다. 세시봉 음악 감상실에서 진행자로서 끼를 뽐내던 중 TV 제작부의 눈에 띈 이상벽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게 됐다. 대학 3학년 시절 처음 마 이크를 잡고 진행을 한 후, 군대를 전역한 이상벽은 그 후로 마이크가 아닌 펜을 잡 고 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한 일간지의 연예기자로 10년 동안 활약하며 기자로 서도 명성을 높였다.
    “고향이 이북이니까 정말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프리랜서 MC라는 직업은 우리처럼 배경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좀 불안한 직업이잖아요. 그러나 정규 신문 기자는 안정적인 분야라는 쪽에서 고민하다가 기자 쪽으로 선택했어요.” - 이상벽 인터뷰 中
    연예기자로 명성을 높인 이상벽. 하지만 그는 10년 만에 기자생활을 정리하고 다 시 방송에 복귀한다. 그리고 <주부가요열창>, <아침마당>, 〈TV는 사랑을 싣고〉 등 운명 같은 프로그램을 만나며 전설의 MC로 거듭나게 된다.
    이상벽하면 장수 MC란 수식어가 떠오를 정도로 <주부가요열창>을 6년, <아침마당 >을 12년 동안 진행해왔다. 그가 시청자들에게 오래 사랑받는 비결을 묻자 <아침마 당>을 함께 진행했던 이금희, 정은아 아나운서는 입을 모아 성실함이라고 답했다. 늘 생방송 1~2시간 전에 도착해 수기로 대본을 고쳐 쓰는 등 성실히 방송에 임하던 이상벽. <아침마당>을 진행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돌연 그가 어지럼증을 호 소하며 쓰러지게 됐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2003년, 12년간 진행하던 아침마당 MC 자리에서 하차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 후 방송에 복귀한 이상벽은 이제 진행자 가 아닌 출연자의 자리에서 방송에 임하고 있지만 그의 성실함은 여전하다.
    “우리 애들한테 항상 얘기하는 게 성실이 밑천이다. 우리가 친척 내외가 없는 이남에서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밑천이다’라고 해요.” - 이상벽 인터뷰 中
    실향민으로, 또 7남매의 장남으로 71년 세월을 오직 성실함만으로 쉼 없이 달려온 이상벽. 94세 어머니와 함께 그려가는 이상벽의 황혼의 인생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 >에서 들어본다.

    285회 2018-08-28

    다시 서기 위해 – 김장훈 편 █ 작년 ‘욕설 논란’ 이후 두문불출한 김장훈의 심경 고백
    작년 이른바 욕설 논란으로 무대에서 사라진 가수 김장훈. 김장훈은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모 시민문화제가 열린 자리에서, 주차를 통제하던 경찰과의 마찰 에 대해 언급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후 김장훈은 부적절한 언행을 자성하는 의미 에서 모든 활동에서 물러나 무대에서 스스로 사라졌다. 1년 3개월만에 만난 김장훈 은 “지난 1년 넘는 시간 동안 말이 갖는 무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면서 앞으로 의 포부를 밝혔다.
    “지금껏 철없이 살아왔지만, 이제는 품위 있게 살겠습니다. 품위를 지키고 싼 티 나지 않게, 여러분들이 김장훈의 팬이란 걸 부끄럽지 않게, 모나지 많게 그렇게 살겠습니다.” - 김장훈 인터뷰 中
    김장훈은 과거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각별히 친한 지인들 외에는 만남을 자 제하고, 상자에 가득한 약과 생식을 먹는 모습은 독거노인 그 자체였다. 그런 김장훈 을 위로해 주는 것은 반려견 키키다. 키키는 원래 김장훈 지인이 키우던 16살의 노견 으로 1년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키키를 살려보겠다며 정성으로 돌본 지 1 년. 시한부 판정이 무색하게 건강을 되찾은 키키는 이제, 외로운 김장훈을 위로해주 는 어엿한 가족이 되었다. 김장훈은 “항상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욕설 논란 이후) 이제 지쳤다고 인정한 순간 내가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온 김장훈의 달라진 모습 을 만나본다
    █ 지독한 알레르기성 천식, 아버지의 부재, 공황장애까지...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던 김장훈의 가족사
    데뷔 27년차의 가수 김장훈. 그동안 숱한 논란과 사고로 겪어왔던 그가 가족사에 대해 어렵지만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의 김장훈은 지금의 강한 이미지와 는 달리 약한 아이였다. 그는 어려서 심각한 수준의 알레르기성 기관지 천식을 앓았 기 때문이다.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성분이 몸 속에 들어오면 고열로 쓰러져 1년 중 4개월 정도를 병원에서 지내야 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생각할 정 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저는 병원에서 3년을 살고, 학교도 못가고, 오래 못 산다는 얘기를 듣고. 항상 나약한 아이였고, 겁도 되게 많았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나이 들어서 좀 발악을 했던 것 같아요.” - 김장훈 인터뷰 中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예민한 김장훈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부재였다. 태어나자마자 이별한 부모님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김장 훈. 혹여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어머니는 아버지 역할을 자처하며 어린 김장훈에게 ‘비겁하고 치사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어린 나이의 김장훈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서운 가르침이었 다.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서 일을 했고, 아버지 없는 자식 소리 들을까봐 굉장히 엄하게 자라서 그런지 어머니와 아직까지도 어렸을 때 골이 좀 있어요.” - 김장훈 인터뷰 中
    엄한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김장훈은, 성장해가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을 돕는 선행을 계속 해올 수 있었다.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하면서도 김장훈에게는 말 못할 아픔이 있었으니, 그를 계속 괴롭혀왔던 공황장애였다. 기약 없이 약을 먹던 어느 날, 발작 증세가 멈췄지만 그는 여전히 긴장감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언제 또 다시 발작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숨이 차잖아요. 그 상태가 계속 되는 거예요. 얼마나 무섭겠어요.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면 드는 생각은 딱 하나에요.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 김장훈 인터뷰 中
    아버지가 없었던 가족사, 병약했던 유년시절, 호시탐탐 자신을 덮쳐왔던 공황장애 등과 싸워오면서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아왔던 김장훈. 그와 그의 가족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김장훈을 지탱해 온 밴드 멤버들과 팬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김장 훈
    ‘나와 같다면’ ‘혼잣말’ ‘나는 남자다’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인기를 누리던 가수 김 장훈은 ‘독도 지킴이’, ‘기부천사’ 등의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많은 선행을 했음에도 그 의 강한 성격 탓에 어느 때부턴가 많은 논란과 사고의 주인공이 되어 구설수에 오르 게 됐다.
    “어떤 이유라 해도 잘못이 정당화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변명은 안 했어요.” - 김장훈 인터뷰 中
    특유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변명. 그로 인해 구설수에 올랐 지만, 자신을 믿고 기다린 팬들을 위해 김장훈은 오랜만에 작업실에서 조촐하게 소 규모 콘서트를 열었다. 콘서트에서 만난 밴드 멤버들과 팬들은 김장훈에게 변하지 않는 지지를 보냈다. 김장훈이 ‘자신에게 실망해서 떠났다가 다시 온 팬이다’라며 말 한 젊은 여성 팬 조윤정은 오히려 떠난 건 김장훈이라며 농담을 건네면서도 여전한 팬심을 과시했고, 멀리 대전에서 올라 온 할머니 팬 권옥자씨는 김장훈에게 참기름 을 선물하며 김장훈을 대신 해 울었다 말할 정도다. 자신을 대신해 울었다는 권옥자 씨의 말에 김장훈은 다시 한 번 결심을 다진다.
    “앞으로 저의 인생은 가족이나 팬 분들이 걱정 안 하게 최선을 다 할 거에요.” - 김장훈 인터뷰 中
    할머니 팬 권옥자씨와 김장훈의 인연은 아주 특별하다. 2017년 1월 7일 광화문에 서 열린 촛불집회 현장에서 권옥자씨는 무대에 올라 김장훈의 노래 ‘사노라면’에 맞 춰 춤과 스트레칭을 선보였고, 인터넷 상에서 스트레칭 할머니라 불리며 화제가 됐 다고 한다. 이후 권옥자씨는 김장훈의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응원하는 열성 팬이 됐 다. 이제 세상에 대한 분노 대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움직이겠다 말하는 김장훈. 그를 지탱해 온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