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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차 방송일 내용
    260회 2018-02-06

    유미는 변신 중 – 강유미 편 █ 천생 개그우먼 강유미, 외모 콤플렉스를 딛고 다시 개그 무대에 서다
    유투버, 시사프로그램 패널 등 개그를 넘나드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중인 ‘생계 형’ 개그우먼 강유미. 22살의 어린 나이에 그 어렵다는 kbs 공채 개그 시험에 치열 한 경쟁률을 뚫고 입성, 불과 1년 만에 ‘고고 예술 속으로’로 대중의 눈도장을 받게 된다. 그 후 ‘사랑의 카운슬러’ ‘분장실의 강 선생님’ 등 많은 히트코너와 다양한 캐릭 터로 사랑받으며 개그콘서트의 대표 개그우먼으로 자리매김한지 어언 15년. 회사도 없고 매니저도 없이 오롯이 홀로 활동하는 ‘생계형 방송인’이라 스스로를 소개한다.
    “유미가 개그적으로 천재라는 건 다 인정하고 있는 거 같아요 김신영씨도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뜬금없이 고고 예술속으로 할 때 보면서 유미는 진짜 천재라고 느꼈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천재 중에 한 명이 강유미라고” - 개그우먼 안영미 인터뷰 中
    “무대에서 강유미는 진짜 거침이 없을 거 같고 당돌하고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강유미는 너무 너무 조용하죠. 저희도 보면 신기해요 그런데 어떻게든 살려요 무대 위에서” - 개그우먼 신봉선 인터뷰 中
    한창 잘나가던 시절, 많은 대중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연 성형수술과 함께 미국 행을 선택하게 된 강유미. 그 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왔던 외모 콤플렉스가 크게 작용했다. 특히 개그우먼이 되고난 후에 시달리던 외모 관련 악플은 그녀의 해 묵은 열등감을 다시 한 번 자극하게 된다. 결국 강유미는 개그를 영영 못 할 수도 있 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고려하며 양악 수술을 감행,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 로 대중들 앞에 서게 된다.
    “이미 많은 분들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대중들 사랑을 받는 얼굴을 확 엎어버린다고 생각하면 대중 분들이 과연 그걸 좋아하시겠냐고요. 당연히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 정도 반응을 기대했고 그래서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을 해둬야 하니까 개그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자격증 따서 기술이라도 배워야지 그렇게 생각했죠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거죠“ - 강유미 인터뷰 中
    █ ‘흙수저’ 환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강유미, 그녀의 꽃짐 부모님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던 학생 강유미는 학교 특별활동으로 연극 무대를 경험하고 소위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끼와 개그 감각을 가진 강유미를 알아보았던 건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흙수저’ 집안의 장 녀가 개그우먼으로 성공한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던 부 모님.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며 부모님에게 수익의 절반을 갖다 드리지만 그 돈이 전 혀 아깝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아니 (돈을) 많이 벌었어도 우리 집안이 원래 빽도 없고 줄도 없고 그냥 (유미가) 많이 벌었어도 많이 썼지 많이 벌면 많이 쓰지 건강이 안 좋으니까 일을 많이 못 했으니까 어떻게 딸한테 의지해야지 아빠가 아프니까” -강유미 어머니 인터뷰 中
    “부모님이잖아요 당연히 수입을 버는 내가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서 아빠가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어떤 분들은 저한테 수입의 반을 부모님한테 주는 게 억울하지 않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이해가 안 돼요.” - 강유미 인터뷰 中
    망설이던 양악수술을 독려했던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드라마 ‘동이’ 촬영 당시, 함께 다녔던 예쁜 여배우들을 보며 더욱 외모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는 강유미. 촬 영장에서 매니저 일을 도맡아 했던 아버지는 옆에서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 게 되었다. 아버지의 격려는 강유미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중 들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서는 것에 대한 힘과 용기가 되기도 했다.
    “조금 예민한 문제긴 한데 내가 시켰어요 내가 하라고 했어요 동이를 찍으러 갔는데 글쎄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야 유미야 너 전에 얘기한 거 있지? 그거 하자. 내가 말 했어요 내가 시켰어요. 쟤 의지 30프로 아빠 70프로로 저렇게 된 거야.” - 강유미 아버지 인터뷰 中
    █ 성형 후 대중들의 외면.. 그리고 인내의 시간
    성형 후 달라진 강유미의 모습을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방송 및 행사 섭외가 원만치 않아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고심 끝에 미국 유학과 snl 작가 활 동을 시작하며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유투브를 통해 1인 미디어를 시작, 감독, 작가, 출연 등 모든 일을 도맡아하며 오롯이 자신만의 방송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제가 15년 동안 방송 생활을 하면서 부침도 있었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쉬어야 하는 일도 생기고 회의적인 시간도 찾아올 때가 있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또는 만족스럽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전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서 모든 걸 내가 컨트롤하고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찾다 보니까 유투브라는 걸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 같아요.“ - 강유미 인터뷰 中
    강유미의 1인 유투브 방송 ‘좋아서 하는 채널’은 만든지 불과 9개월 만에 구독자 수 27만 명을 돌파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많을 때는 두 달에 5000만원의 수익을 올릴 정도로 알짜배기 방송이다. 그러나 그녀의 만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투브 만 으로 100억 벌기를 목표로 삼으며 이에 매진하는 것은 요즘 강유미의 새로운 기쁨이 다. 유투브는 그녀에게 새로운 도약의 발판인 동시에 혼자만의 보험이기도 하다.
    █ 그녀의 변신은 무죄! 강유미는 오늘도 변신 중
    개그 프로그램에서 선보였던 기존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의 도전을 꿈꾸고 있는 강유미. 최근 정규로 편성된 시사 프로그램에서 한 코너를 맡으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개그우먼인 그녀가 ‘정알못’을 대변하며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지는 모습 은 그간 무겁게만 느껴졌던 정치시사 영역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강유미 역시 처음 받은 시사 프로그램의 제안에 조금은 망설였지만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 었다고 한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하는 걸 좋아해요 지금까지 했던 분야가 아닌 공개 코미디가 아닌 다른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오니까 솔직히 내심 반가웠어요 아직도 머릿속이 안개에 빠진 것처럼 내가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잘하고 있는 건가 계속 불안하고 사실은 파일럿 방송 때 반응이 좋아서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거에요” - 강유미 인터뷰 中
    여성 예능인들이 설 자리가 부족한 요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 아가는 강유미. 어느 자리 어느 무대에서건 자신의 개그를 통해 웃는 사람들을 보 는 것이 가장 큰 희열이라는 그녀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천생 코미디언이다.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 안의 행복을 깨닫고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는 법을 알게 되 었다는 데뷔 15년차의 개그우먼.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선 강유미의 파란만장 도전 스토리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259회 2018-01-30

    남자의 품격 알베르토 몬디 ∎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건너온 이탈리아 청년
    ‘비정상회담’, ‘어서와~한국은 처음이지?’ 등 여러 방송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방 송인 알베르토 몬디. 외국인인 그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 지 못했던 일이다. 처음 한국 땅은 밟은 것은 10년 전. 알베르토는 스무 살이 될 때까 지 한국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인근 시골 마을의 청년이었 다. 10대 시절 축구 선수를 꿈꾸었고 20대 초반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 베이시스트 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동아시아문화를 전공, 중국 유학을 하던 중 운명적인 사람 을 만난다. 건실한 이탈리아 청년이 한국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람들이 물어보잖아. 한국에 왜 왔냐고. 지금 내가 아내 따라왔다고 하면 되게 멋있어 보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건 사실이야. 그때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한국에 온 거야 “ - 아내에게 건네는 알베르토의 이야기 中 -
    한국에 오기 전 알베르토는 유명 회사의 입사가 예정돼있던 상태. 그리운 여자 친구 를 만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기차를 타고 한국에 온 그는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 주 한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강원대에서 경제학 석 사 과정을 밟으며 그는 한국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결혼에 골 인한다. 당시 그의 결혼자금은 단돈 700만원. 고시원 생활까지 해가며, 회사를 다니 며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작은 방을 얻을 보증금을 마련한 것이다. 낯선 한국 땅에 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레오(16개월)를 얻기까지 그는 부모와 고향, 많은 친구들 과 안정된 직장을 버려야 했다.
    “잃은 건 당연히 많죠. 부모님 자주 못 뵙고 동생 자주 못 보고 친구들을 더 자주 못 보고 친구들이나 여행이나 어디 놀러가는 거 다 못하고. 그런데 이것도 경제학 원리 중에 하나인데, 인생이 교환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 얻으려면 하나 포기해야 된다. 그래서 사실 저는 한국에 와서 잃은 게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냥 인생 자체가 그런 거니까 사실 이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잃은 게 없었던 것 같고 결국 얻은 게 많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 제가 이제 많은 꿈을 이루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 알베르토 인터뷰 中 -
    ∎ 한국을 사랑하는 바른생활 아저씨, 한국인이 사랑하는 이탈리아 친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 알베르토는 평창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발 탁, 영광스런 그 임무를 수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온 그를 알아보고 팬을 자처하며 말을 건넸다. 알베르토의 팬은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알베르토 와 함께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그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똑똑하고, 예의 바르고, 잘 생겼는데, 왠지 모르게 너무 편하다고. 알베르토의 서른네 번째 생일날. 미국, 영국, 스페인, 멕시코는 물론 아프리카 가 나, 이탈리아, 중국에서 한국까지. 세계 각국의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람을 불러 모으고, 사람과 사람이 국적, 언어, 나이를 초월해 친구가 되게 하는 힘이 알베 르토에게 있다.
    “알베 형이 이상하게 편해요. 한국사람 같아요. 한국동네 형 같아요. 진짜 편해요. 처음에는 당연히 이탈리아 사람이니까 어쨌든 많이 알지 못하겠지 했는데 너무 많이 알아가지고 제가 이제는 그냥 물어봐요, 궁금한 거. 공부를 진짜 많이 한 게 티가 나요. 한국 공부를요.“ - 가수 딘딘 인터뷰 中 -
    “완전 브라더죠 브라더. 친절하고 모든 사람들한테 잘해줘요. 너무 좋아요. 거의 완벽한 남자예요. 알베르토가 나쁘거나 약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진짜로요. 되게 좋아요 사람이.“ - 방송인 샘 오취리 인터뷰 中 -
    ∎ 방송 최초로 털어놓는 알베르토의 속사정...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당뇨 병과 한국 정착을 도와주었던 한국인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다
    한국 정착 초기. 너무나 가난해 잠 잘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그에게 아무 대가 없이 방을 내주고, 한국어와 한국 가족의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은인, 알베르토의 ‘한국 엄 마’를 찾아 나섰다. 10년 전, 허름한 티셔츠 두 장 들고 한국에 들어왔던 그 시절, 사 랑하는 아내가 한국 정착의 목표였다면 ‘한국 엄마’는 알베르토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 무렵 알베르토는 자신에게 1형 당뇨병이 발병했음을 알게 된다. 유전도, 잘못된 생활습관, 식습관 탓도 아니다. 원인불명. 그러나 평생 인슐린을 맞아야 하 는 병이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을 것이고, 하나를 선택하면 가지 못한 다른 길은 어 차피 버려야 하는 것. 긍정의 아이콘 알베르토는 비단 방송을 통해 한국과 소통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직원 4명의 사회적 기업의 일원 이 된 것. 좋은 기업이 사회를 바꾼다는 철학을 가진 알베르토는 발달장애인들과 함 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제2의 고향이죠. 제가 20대를 한국에서 보냈으니까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지 장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국은 저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너무나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한국 사람이 제일 좋고요.“ - 알베르토 인터뷰 中 -
    사랑을 찾아 떠나 왔던 낯선 나라에서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이제는 한국인들의 사 랑받는 방송인이 된 알베르토. 어린 시절 꿈꿔왔던 미래는 한국에 오면서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한국에서 새로운 꿈들을 실현시키고 있다. 숱한 우 여곡절과 갈림길에서 올곧은 선택을 해나가는 그의 품위 있는 인생을 <사람이 좋다 >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258회 2018-01-21

    유쾌한 재란 씨, 찬란한 영란 씨. <박재란>
    ▶ ‘여든이면 어때서’ 청춘을 노래하는 박재란

    ‘산너머 남촌에는’을 통해 현미, 한명숙과 함께 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 던 박재란. 하지만 이후 결혼과 이혼으로 연예계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던 그녀. 그런 그녀가 지난 해 ‘꼴찌면 어때서’를 발매하며 다시 돌아왔다. 어느덧 여든의 문턱을 앞둔 그녀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다.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 매 어디를 봐도 최소 20년은 젊어 보이는 그녀.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핑크색 의자 에 앉아 아침으로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는 그녀를 누가 여든이라고 생각할까?
    ▶ 박재란, 가슴에 묻은 딸을 위해 노래하다
    이혼 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비자 문제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교민에게 당한 20억 사기에 화재로 모든 것을 잃기 까지. 연이은 악재에 건강마저 잃어 두 차례의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것도 모자 라 지난 2014년에는 막내딸을 심장마비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 박재란의 막 내딸인 박성신은 ‘한번만 더’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가수다. 딸이 떠난 지도 어 연 4년이 됐지만 자신의 재능을 다 펴보지 못한 채 져버린 막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는 박재란. 딸의 몫까지 노래하기 위하여 오늘도 무대에 오르는 그 녀다.
    “막내는 성격이며 재능이며 날 빼닮았어요. 매일 딸을 생각하면서 기도해요. ‘네가 못 이루고 갔던 것 백분의 일이라도 엄마가 하고 가겠다’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제가 그 나머지를 해야죠. 딸의 몫까지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무대에서 노래도 열심히 해야죠.” - 박재란 int -
    막내딸마저 잃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큰 딸 박성은 씨. 하지만 큰 딸마저도 남편 의 사업 때문에 중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가 어연 20년이 흘렀다.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인 손녀, 손자들도 모두 중국 북경대에서 학업을 이어가느라 1년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것이 실상. 영상 통화로 그리움을 달래 보지만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항상 해피바이러스를 뿜어내다가도 불이 꺼진 집으로 들어갈 때면 어깨 가 처지는 그녀. 하지만 노래가 나오는 무대에선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즐겁 게 노래하는 78세의 최고령 가수 박재란. 그녀의 유쾌한 일상이 공개된다.
    <허영란>
    ▶ 허영란, 배우라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다

    17살의 나이로 MBC 청소년드라마 ‘나’로 화려하게 데뷔한 허영란. 그녀는 SBS 시 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권오중을 짝사랑하는 ‘허 간호사 역’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가 가득할 것 같았던 연예계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근 거 없는 열애설 및 다양한 루머에 시달려야 했던 허영란.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 로 소속사와의 문제까지 겪어야했다.
    ▶ 그녀가 운전기사가 된 이유는?! 내조의 여왕 영란 새댁의 신혼생활기
    결혼 3년차 새댁 허영란. 지난 2016년 동갑내기 연극배우와 결혼을 한 그녀. 연극 상 대역이었던 김기환 씨는 연기를 할 수 없어 우울했던 시기에 허영란을 웃게 해준 사 람이었다. 수입도 변변치 않은 무명 배우였음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 다 뜨거웠던 김기환 씨. 그녀는 결혼 후 남편 내조에 여념이 없다. 아직 무명인 남편 이 영화사에 프로필을 돌리기 위해 서울이라도 가야할 때면 운전을 자청하는 그녀. 연기 선배로서 조언은 물론 매니저 역할까지, 내조의 여왕이 따로 없는 영란 새댁. 조금씩 소박하게 행복을 키워나가는 그들의 알콩 달콩한 일상이 공개된다.
    “전 남편의 끼와 열정을 인정하고 믿거든요. 사실 그 열정 하나 보고 결혼한 거예요. 그래서 가끔은 대전에 내려와서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요. 정말 끼가 많은 사람인데... 저도 남편도 몸은 대전에서 있지만 언제나 마음 속 1순위는 연기예요." - 허영란 INT -
    ▶ ‘허 간호사’ 허영란, 세차장 사장님 되다?!
    연기 활동이 뜸해지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폐쇄적인 삶을 살았던 자신을 바 꾸고 싶었다는 그녀. 그날로 무작정 집 앞 카페를 찾아가 무급으로 일할 테니 커피 만드는 법을 전수해달라고 사정했다. 마침내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딴 허영란은 엄마 와 오빠가 사는 대전에 내려와 남편과 함께 커피 파는 세차장을 차렸다. 커피 제조부 터 손님 응대, 세차장 관리까지 척척 해내는 그녀에게서 더 이상 화초 가튼 여배우 는 찾아볼 수 없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연기밖에 없었던 여배우에서 ‘세차장 허 사장’ 이 되기까지, 허영란의 용감한 도전을 <사람이 좋다>에서 담아본다.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경제적인 문제였죠. 결혼을 하고 막상 현실이 눈앞에 닥치니 마냥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처음에는 일로 생각해 시작했지만 지금은 달라요. 카페와 세차장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제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옛날에는 사람 많은 곳도 피하고 혼자만 있었는데 사업을 시작하고부터는 저를 놓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제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고요” - 허영란 INT -

    257회 2018-01-14

    엄마의 빈자리, 배우 故 김영애 ■ 빛났던 만큼 굴곡진 인생 -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민비>, <형제의 강>, <로열패밀리>, <변호인> 등 100편이 넘는 드라마, 70편에 가 까운 영화에서 때론 어여쁜 아가씨로, 사려 깊은 아내로, 투박한 엄마로 대중의 심금 을 울린 사람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물했던 배우 故 김영애, ‘국민 배우’인 그녀가 지난 해 4월, 배우 생활 46년의 여정을 마감했다. 1974년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기상부터 2017년 대종상 특별상까지 스물 세 개의 트로피가 그녀의 열정적인 연 기 인생을 대변한다.
    “작은 역할부터 아주 당차게 해나가더라고요. 제일 중요한 건 영애는 그 역할을 100% 소화하려고 수십 번이라도 반복적으로 해내는 힘이 강했어요.” - 배우 이정길 인터뷰 中
    “모든 생활을 잊고 연기에 뛰어드는 몰입감이요. ‘나’를 버리는 진짜 배우시잖아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그런 모습들을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요.” - 배우 최강희 인터뷰 中
    그녀의 20대부터 60대를 함께한 동료들은 입을 모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였다고 말한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결혼 후에 도 남편과 아들 민우를 위해 더 치열해져야만 했던 인생. 아름다운 배우, 故 김영애 의 67년 인생을 <사람이 좋다>에서 되돌아본다.
    ■ 엄마를 이해하는 시간, 2년 반 그리고... 엄마의 부재
    데뷔와 동시에 아버지가 쓰러져 가장의 역할을 맡은 김영애.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달리던 그녀의 삶은 결혼을 하고 더욱 치열해졌다. 지 켜야 할 가족이 늘어났기에 휴식 없이 달리던 와중,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 를 찍었다. 더 이상은 생계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황 토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도난 공장에서 더부살이로 시작한 황토팩 사업. 그녀의 절 실함에 응답이 왔다. 매출 1500억이라는 기적을 낳은 것. 하지만 꽃길이 펼쳐질 것 같았던 순간도 잠시, 한 보도 프로그램의 ‘황토팩 중금속 검출’ 허위 보도로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2012년, 황달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췌장암 판정을 받 게 된다. 암세포가 간과 림프에 전이되어 2015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아끼던 물건, 사람들에게 인사를 고하며 삶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연기를 놓지 않 았다.
    ■ 당신과 나에겐 너무 짧았던 2년 반 - 가슴에 새긴 날들
    김영애가 46년간의 연기 인생을 숨 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기다림에 익숙해진 사람 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는 아들 민우. 민우의 기억 속 어머 니는 대본을 보거나 연기 연습을 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라는데... 사춘기를 맞이하고 엄마와 자꾸 부딪히자 프랑스로 도망치듯 요리 공부를 하러 떠났다. 막상 몸이 멀어 지자 마음이 닿았다. 아내 조고은과 결혼 후 1년 동안 세 사람은 여행을 다니며 조금 씩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는 김영애. 한편 2012년, 민우는 어머니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영주권 과정을 밟던 와중 청천 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앞으로 살날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울음 섞인 어머 니의 전화. 당장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날아온 민우. 식사 한 끼 잘못 드시 면 건강에 치명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식재료를 싸들고 촬영장에 상주했다는데... 1 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모자는 너무나도 어려웠던 화해를 하게된다.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당신을 자식에게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김영애라는 사람이 살아왔던 세월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어요. 좀 더 일찍 어머니를 이해하고, 표현을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바보 같은 소리지만..” - 아들 이민우 인터뷰 中
    어머니가 떠나고 8개월이 지났다. 2018년 새해를 맞아 민우는 마지막까지 어머니 곁 을 지켜줬던 친구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한편,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 을 정리하며 새로운 삶을 걸어가려는 아들 민우. 어머니와 함께했던 한국에 정착할 지 미국으로 되돌아갈지 선택을 해야 한다.
    치열했던, 굴곡졌던,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던 어머니께 전하는 아들 민우의 서투 른 진심부터 그 앞에 남은 선택까지 <사람이 좋다>가 함께 한다.

    256회 2018-01-07

    아버지의 이름으로 배우 박준규! ■ 유쾌함과 묵직함이 공존하는 배우 박준규를 만나다.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연기부터 맛깔 나는 감초 연기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웃음 과 감동을 선사하는 배우 박준규!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어느새 30년째 연기 외길인생을 걷고 있다.
    “벽이 없는 배우입니다. 항상 열려있어요. 안팎으로 좋은 배우이자 또 좋은 친구이자 또 후배들한테 좋은 형입니다.” - 김상중 인터뷰 中
    “굉장히 성격파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연기파. 개성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 하정우 인터뷰 中
    배우 고 박노식의 아들로 처음부터 화려했을 것만 같은 그의 연기 인생은 마냥 순탄 치만은 않았다. 15년이 넘는 무명시절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닥친 경제위기로 반 지하 주택에서의 생활. 그리고 ‘박노식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없애기 위해 애써온 시간. 대중에게 ‘배우 박준규’로 인정받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겪은 그의 연기 인생이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다.
    그의 이름 앞엔 ‘박노식의 아들’ 혹은 ‘쌍칼’이란 수식어가 긴 시간 따라다녔다. 지금 은 ‘배우 박준규’로 당당히 인정받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박준규의 꿈은 배우가 아니 었다. 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영화배우 박노식이 아버지였기에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늘 바쁘기만 했다. 일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박 준규는 ‘나는 절대 배우는 안 하리라’ 마음먹었다.
    “제 생일날 옛날 명동에 있었던 코스모스 백화점에 아버지가 나 선물 사주러 가셨는데 아줌마들 등쌀에 선물 못 사갖고 나왔어요. 아줌마들이 계속 아버지한테 사인 해 달라 그러고 막 와서 만지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끝내 못 사갖고 나와 갖고 집에도 잘 안 계시고... 어린 나이 때는 저는 영화배우 안 한다 그랬죠. 이건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바쁘고 이렇게 힘들어갖고 어떻게 해 그래서 싫어했었는데 때가 되니까 저도 하게 되더라고요.” - 박준규 인터뷰 中
    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끼와 재능을 숨길 수 없던 박준규. 안정된 직장을 포기 하고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에 배우가 되었다. 1988년 영화 ‘카멜레온의 시’로 데뷔한 박준규는 영화가 개봉하면 아버지처럼 스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박준규의 배우 인생은 힘겨운 길을 걷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이민 생활 당시, 아버지 박노식은 사업에 실패하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 아버 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재기를 꿈꿨지만 이후 병을 얻게 됐고, 아들 박준규에게 남겨 준 재산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아버지 돈 다 썼지 이래요 저한테 근데 굉장히 잘못 알고 계신 거고 아버지가 영화판에 계시면서 검열도 너무 심했고 이민을 가자고 하셨는데 사업에 실패하신 거죠 그렇게 사시다가 병 앓으시고 입원비 하시고 돈 땡전 한 품 안 주시고 혼자 다 쓰시고 가셨어 멋쟁이지 한마디로” - 박준규 인터뷰 中
    “반지하 집 얻을 돈 밖에 안 남더라고요. 한번은 한여름인데 새벽에 막 무슨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밖에 나가봤더니 발목 정도가 잠길 정도로 마루에 물이 찬 거예요.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남편을 보니까 제가 울면 안 되겠더라고요. 내가 여기서 울면 이 사람이 정말 속상하겠구나.” - 아내 진송아 인터뷰 中
    무명시절 반지하 생활을 하면서 박준규는 작품을 가리지 않고 연기했다. 그가 쉬지 않고 일해 온 이유는 바로 가족들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7년이 지난 2002년. 박준규는 자신의 배우 인생을 바꿔줄 작품 을 만난다. 바로 드라마 ‘야인시대’이다. 인생 캐릭터 ‘쌍칼’을 만나 남우조연상이란 생애 첫 연기상의 쾌거를 이룬다. 당시, 반지하에서 남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 던 그의 아내. 그때부터 가족의 고생도 끝이 났다.
    유산 대신 재능을 물려주고 떠난 아버지 박노식을 대신해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쉴 틈 없이 연기 인생을 달려온 박준규의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보자.
    ■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버지를 이해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박준규는 두 아들에게만큼은 친 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쉬는 날이면 함께 목욕탕을 가는 것도, 자기 전 술 한 잔 같이하며 연애상담을 해주는 것도, 틈틈이 삼부자가 소소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 도 두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해주고픈 바람 때문이다.
    “제가 아버지 임종을 못 봤어요. 부산에서 아가씨와 건달들 공연이 있었는데 공연 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봤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시는데 상태가 좀 안 좋으신 거 같다는 얘기를 들어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이번에 부산 공연인데 안가고 아버지 옆을 지키겠습니다. 그랬더니 욕을 먹었어요. 이놈아 배우가 무대에 가 있어야지 내 옆에서 네가 있다고 내가 낫는 것도 아니고 공연하러 가라고.” - 박준규 인터뷰 中
    임종 때까지도 아들을 무대로 내몰았던 아버지 박노식. 배우의 인생이 쉽지 않은 길 임을 아들 박준규에게 아버지 박노식은 그렇게 알려준 것이다. 박준규는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두 아들도 배우의 길을 걷겠다 고 한다. 아버지가 그랬듯 박준규도 두 아들에게 똑같은 가르침을 주려 한다. 스스 로 배우의 길은 개척해가길 바라되 아버지로서는 두 아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고 싶은 박준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 박준규의 이야기는 일요일 오전 8시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