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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순

    회차 방송일 내용
    257회 2018-01-14

    엄마의 빈자리, 배우 故 김영애 ■ 빛났던 만큼 굴곡진 인생 -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민비>, <형제의 강>, <로열패밀리>, <변호인> 등 100편이 넘는 드라마, 70편에 가 까운 영화에서 때론 어여쁜 아가씨로, 사려 깊은 아내로, 투박한 엄마로 대중의 심금 을 울린 사람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물했던 배우 故 김영애, ‘국민 배우’인 그녀가 지난 해 4월, 배우 생활 46년의 여정을 마감했다. 1974년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기상부터 2017년 대종상 특별상까지 스물 세 개의 트로피가 그녀의 열정적인 연 기 인생을 대변한다.
    “작은 역할부터 아주 당차게 해나가더라고요. 제일 중요한 건 영애는 그 역할을 100% 소화하려고 수십 번이라도 반복적으로 해내는 힘이 강했어요.” - 배우 이정길 인터뷰 中
    “모든 생활을 잊고 연기에 뛰어드는 몰입감이요. ‘나’를 버리는 진짜 배우시잖아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그런 모습들을 존경하고 배우고 싶어요.” - 배우 최강희 인터뷰 中
    그녀의 20대부터 60대를 함께한 동료들은 입을 모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였다고 말한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결혼 후에 도 남편과 아들 민우를 위해 더 치열해져야만 했던 인생. 아름다운 배우, 故 김영애 의 67년 인생을 <사람이 좋다>에서 되돌아본다.
    ■ 엄마를 이해하는 시간, 2년 반 그리고... 엄마의 부재
    데뷔와 동시에 아버지가 쓰러져 가장의 역할을 맡은 김영애.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달리던 그녀의 삶은 결혼을 하고 더욱 치열해졌다. 지 켜야 할 가족이 늘어났기에 휴식 없이 달리던 와중,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 를 찍었다. 더 이상은 생계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황 토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도난 공장에서 더부살이로 시작한 황토팩 사업. 그녀의 절 실함에 응답이 왔다. 매출 1500억이라는 기적을 낳은 것. 하지만 꽃길이 펼쳐질 것 같았던 순간도 잠시, 한 보도 프로그램의 ‘황토팩 중금속 검출’ 허위 보도로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2012년, 황달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췌장암 판정을 받 게 된다. 암세포가 간과 림프에 전이되어 2015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아끼던 물건, 사람들에게 인사를 고하며 삶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연기를 놓지 않 았다.
    ■ 당신과 나에겐 너무 짧았던 2년 반 - 가슴에 새긴 날들
    김영애가 46년간의 연기 인생을 숨 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기다림에 익숙해진 사람 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는 아들 민우. 민우의 기억 속 어머 니는 대본을 보거나 연기 연습을 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라는데... 사춘기를 맞이하고 엄마와 자꾸 부딪히자 프랑스로 도망치듯 요리 공부를 하러 떠났다. 막상 몸이 멀어 지자 마음이 닿았다. 아내 조고은과 결혼 후 1년 동안 세 사람은 여행을 다니며 조금 씩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는 김영애. 한편 2012년, 민우는 어머니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영주권 과정을 밟던 와중 청천 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앞으로 살날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울음 섞인 어머 니의 전화. 당장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날아온 민우. 식사 한 끼 잘못 드시 면 건강에 치명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식재료를 싸들고 촬영장에 상주했다는데... 1 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모자는 너무나도 어려웠던 화해를 하게된다.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당신을 자식에게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김영애라는 사람이 살아왔던 세월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어요. 좀 더 일찍 어머니를 이해하고, 표현을 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바보 같은 소리지만..” - 아들 이민우 인터뷰 中
    어머니가 떠나고 8개월이 지났다. 2018년 새해를 맞아 민우는 마지막까지 어머니 곁 을 지켜줬던 친구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한편,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 을 정리하며 새로운 삶을 걸어가려는 아들 민우. 어머니와 함께했던 한국에 정착할 지 미국으로 되돌아갈지 선택을 해야 한다.
    치열했던, 굴곡졌던, 마지막까지 열정적이었던 어머니께 전하는 아들 민우의 서투 른 진심부터 그 앞에 남은 선택까지 <사람이 좋다>가 함께 한다.

    256회 2018-01-07

    아버지의 이름으로 배우 박준규! ■ 유쾌함과 묵직함이 공존하는 배우 박준규를 만나다.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연기부터 맛깔 나는 감초 연기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웃음 과 감동을 선사하는 배우 박준규!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어느새 30년째 연기 외길인생을 걷고 있다.
    “벽이 없는 배우입니다. 항상 열려있어요. 안팎으로 좋은 배우이자 또 좋은 친구이자 또 후배들한테 좋은 형입니다.” - 김상중 인터뷰 中
    “굉장히 성격파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연기파. 개성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 하정우 인터뷰 中
    배우 고 박노식의 아들로 처음부터 화려했을 것만 같은 그의 연기 인생은 마냥 순탄 치만은 않았다. 15년이 넘는 무명시절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닥친 경제위기로 반 지하 주택에서의 생활. 그리고 ‘박노식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없애기 위해 애써온 시간. 대중에게 ‘배우 박준규’로 인정받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겪은 그의 연기 인생이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다.
    그의 이름 앞엔 ‘박노식의 아들’ 혹은 ‘쌍칼’이란 수식어가 긴 시간 따라다녔다. 지금 은 ‘배우 박준규’로 당당히 인정받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박준규의 꿈은 배우가 아니 었다. 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영화배우 박노식이 아버지였기에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버지는 늘 바쁘기만 했다. 일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박 준규는 ‘나는 절대 배우는 안 하리라’ 마음먹었다.
    “제 생일날 옛날 명동에 있었던 코스모스 백화점에 아버지가 나 선물 사주러 가셨는데 아줌마들 등쌀에 선물 못 사갖고 나왔어요. 아줌마들이 계속 아버지한테 사인 해 달라 그러고 막 와서 만지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끝내 못 사갖고 나와 갖고 집에도 잘 안 계시고... 어린 나이 때는 저는 영화배우 안 한다 그랬죠. 이건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바쁘고 이렇게 힘들어갖고 어떻게 해 그래서 싫어했었는데 때가 되니까 저도 하게 되더라고요.” - 박준규 인터뷰 中
    하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끼와 재능을 숨길 수 없던 박준규. 안정된 직장을 포기 하고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에 배우가 되었다. 1988년 영화 ‘카멜레온의 시’로 데뷔한 박준규는 영화가 개봉하면 아버지처럼 스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박준규의 배우 인생은 힘겨운 길을 걷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이민 생활 당시, 아버지 박노식은 사업에 실패하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 아버 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재기를 꿈꿨지만 이후 병을 얻게 됐고, 아들 박준규에게 남겨 준 재산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네가 아버지 돈 다 썼지 이래요 저한테 근데 굉장히 잘못 알고 계신 거고 아버지가 영화판에 계시면서 검열도 너무 심했고 이민을 가자고 하셨는데 사업에 실패하신 거죠 그렇게 사시다가 병 앓으시고 입원비 하시고 돈 땡전 한 품 안 주시고 혼자 다 쓰시고 가셨어 멋쟁이지 한마디로” - 박준규 인터뷰 中
    “반지하 집 얻을 돈 밖에 안 남더라고요. 한번은 한여름인데 새벽에 막 무슨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밖에 나가봤더니 발목 정도가 잠길 정도로 마루에 물이 찬 거예요.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남편을 보니까 제가 울면 안 되겠더라고요. 내가 여기서 울면 이 사람이 정말 속상하겠구나.” - 아내 진송아 인터뷰 中
    무명시절 반지하 생활을 하면서 박준규는 작품을 가리지 않고 연기했다. 그가 쉬지 않고 일해 온 이유는 바로 가족들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7년이 지난 2002년. 박준규는 자신의 배우 인생을 바꿔줄 작품 을 만난다. 바로 드라마 ‘야인시대’이다. 인생 캐릭터 ‘쌍칼’을 만나 남우조연상이란 생애 첫 연기상의 쾌거를 이룬다. 당시, 반지하에서 남편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 던 그의 아내. 그때부터 가족의 고생도 끝이 났다.
    유산 대신 재능을 물려주고 떠난 아버지 박노식을 대신해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쉴 틈 없이 연기 인생을 달려온 박준규의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보자.
    ■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버지를 이해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박준규는 두 아들에게만큼은 친 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쉬는 날이면 함께 목욕탕을 가는 것도, 자기 전 술 한 잔 같이하며 연애상담을 해주는 것도, 틈틈이 삼부자가 소소한 데이트를 즐기는 것 도 두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해주고픈 바람 때문이다.
    “제가 아버지 임종을 못 봤어요. 부산에서 아가씨와 건달들 공연이 있었는데 공연 가기 전에 아버지한테 한번 여쭤봤습니다. 병상에 누워계시는데 상태가 좀 안 좋으신 거 같다는 얘기를 들어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이번에 부산 공연인데 안가고 아버지 옆을 지키겠습니다. 그랬더니 욕을 먹었어요. 이놈아 배우가 무대에 가 있어야지 내 옆에서 네가 있다고 내가 낫는 것도 아니고 공연하러 가라고.” - 박준규 인터뷰 中
    임종 때까지도 아들을 무대로 내몰았던 아버지 박노식. 배우의 인생이 쉽지 않은 길 임을 아들 박준규에게 아버지 박노식은 그렇게 알려준 것이다. 박준규는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두 아들도 배우의 길을 걷겠다 고 한다. 아버지가 그랬듯 박준규도 두 아들에게 똑같은 가르침을 주려 한다. 스스 로 배우의 길은 개척해가길 바라되 아버지로서는 두 아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고 싶은 박준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 박준규의 이야기는 일요일 오전 8시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255회 2017-12-31

    2017 송년특집 <사람이 좋다> ■ 2017년 <사람이 좋다>와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장악하며 세간을 뜨겁게 달 궈 온 화제의 프로그램 <사람이 좋다>
    올해 출연한 51명의 주인공 또한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진솔한 모습으로 수많은 시청 자를 울고 웃겼는데. 영화보다 더욱 감동적인 이들의 스토리는 시청자들의 많은 관 심과 공감을 이끌어냈다. 2017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특집 <사람이 좋다>는 올 해를 빛낸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보고, 방송 후 달라진 그들의 근황을 전한다.
    <사람이 좋다>는 집중적으로 날 추적하는 프로그램이니까 한편으로는 상당히 고마웠고,.. 어쨌든 진솔하게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줬어요 - 이순재 인터뷰 中-
    제가 방송한 지 거의 18년째 되는데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사람이 좋다>입니다 - 정종철 인터뷰 中-
    ■ 어서와! 이런 모습은 처음이지? <2017 사람이 좋다> 명장면 베스트!
    올해 <사람이 좋다>에서는 과거 한 시대를 주름잡던 추억의 스타들부터 2017년 현 재 전방위에서 맹활약 중인 톱스타들과 함께했다. 90년대 여심을 훔친 하이틴 스타 에서 최근 딸바보로 변한 김원준, 새로운 곡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꿈꾸는 가수 성 진우와 원미연, 그리고 올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김흥국과 이하늬, 그리고 영원한 국민배우 이순재까지! 24시간 쫓아다니는 <사람이 좋다>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올 해도 어김없이! 다른 방송에선 만나 볼 수 없었던 반전 매력을 공개했는데. <2017 송 년특집 사람이 좋다>는 올 한해도 꾸밈없는 모습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화제 의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솔직담백한 명장면들을 다시 만난다.
    근데 너무 따라 다니시니깐... 맘대로 움직이다 보면 뒤에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예리한 질문들도 되게 많이 하세요. 콕 집어서 - 원미연 인터뷰 中-
    ■ ‘웃음+감동’ 믿고 보는 러브스토리. 그리고 뒷이야기
    이번 <송년특집>편에서는 올 한 해 프로그램을 빛냈던 주인공들의, 방송 후 달라진 근황을 전한다.
    - ‘6시간 키스의 주인공 차유람♥이지성’ 둘째가 생겼어요! 방송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6시간 키스의 주인공 차유람-이지성 부부! 그동안 둘째 가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현재 차유람 씨는 임신 11주! 제작진이 태명에 대해 묻자 이지성은 “콩콩이다. 첫째 딸 한나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 콩순이인데, 그 동생 이름이 콩콩이”라며 여전한 딸 바보의 모습을 과시했다.
    - 방송 당시 대사 없는 단역 맡았던 오정태,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일대사 건! 또한, 올해 초 방영된 <사람이 좋다>에서 두 딸의 아버지이자 부모님을 봉양하는 가 장으로서, 두 눈을 때려가며 새벽잠을 깨우고, 직접 영업을 뛰어가며 누구보다 열심 히 사는 모습이 전파를 탔던 개그맨 오정태의 근황도 전한다. 방송 당시 오정태는 MBC 드라마 ‘역적’에서 대사 없는 단역을 맡았지만 언젠가는 대사가 있는 배역이 주 어질 날이 있을 거라며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공개됐었는데. 방송 11개월 만에 <송 년특집-사람이 좋다>가 만난 그는, 최근 그의 바람대로 영화 첫 주연을 맡아 놀라움 을 선사했다. 또한, 이번 영화 출연이 ‘모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덕분’이라며 고 마움을 전했다.
    이밖에도 <사람이 좋다>에서 중증치매 진단을 받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 니 사연을 공개해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았던 개그맨 윤택과, ‘옥주부’가 된 계기와 힘든 가족사를 공개했던 개그맨 정종철, 방송에서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공개해 화제 를 모았던 국민배우 이순재까지! 방송 후 달라진 근황과 사람이 좋다 출연 소감을 전 한다.
    <사람이 좋다> 방송 이후로, 주변에서 ‘너 그렇게 고생하는지 몰랐다’라는 격려의 말들이 많았고, 너무 좋은 글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올해 <사람이 좋다> 때문에 정말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 오정태 인터뷰 中-

    254회 2017-12-24

    이제 60, 다시 시작, 가수 장은숙 ∎ ‘춤을 추어요’의 소녀 가수에서 일본 연예기획사 대표까지, 숨 가쁘게 달려 온 인생사
    70년대 ‘춤을 추어요’로 전국을 강타했던 가수 장은숙이 어느덧 데뷔 40년차 가요계 대선배가 되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장은숙은 20년 동 안 일본에서 가수생활을 해온 한류 1세대이기도 하다. 스무 살 나이에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장은숙. 이제 돌아와 털어놓는 속마음.
    장은숙하면 ‘섹시하다’는 표현들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미니스커트를 매주마다 거의 1년 동안 입었어요. 그 모습을 보이면서도 죄송했던 게 노래를 들어주신 게 아니고 항상 시선을 제 미니스커트에 오게 한 저의 불찰이 컸기 때문이에요. “쟤는 아마도 저 ‘춤을 추어요’ 한 곡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걸” ...그런 애기를 사실 여러 번 들었어요. 많은 상처가 됐 었지만. - 장은숙 인터뷰 中 -
    1995년 그녀에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때 일본 가요계의 러브콜도 있었다. 두세 달 활동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일본행. 그런데 20년이 흘렀다. 일본 내 제 작 앨범 23장. 총 25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며 지금은 일본 연예기획사 대표 가 되어 후배가수까지 양성하고 있는 그녀. 사람들은 그녀를 들어 여장부라고 부른 다. 하지만 그렇게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과감하게 도전한 일본 진 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일본어도 몰랐다. 이동할 때마다 일본 어 단어를 외우고, 매일같이 노래 연습을 하며 마침내 일본에서 데뷔를 하게 됐지만 그 시작은 초라했다.
    캠페인을 하고 있다가 요코하마에서 한 모녀를 마주했는데 한국인인 거예요.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고요. 저는 오디션을 통해서 우수상을 받고 바로 데뷔를 해서 히트곡을 가진 가수라는 것 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차가 왔다 갔다 하는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있는 장은숙의 모습을 보인 거예요. 정말 솔직히 말씀드려서 창피했어요. - 장은숙 인터뷰 中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는 장은숙에 관한 기이한 루머가 돌았다. 한평생 떳떳 하게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장은숙은 더욱 다짐했 다. 당당히 일본가요계에서 진정한 노래를 하고 돌아가겠노라고.
    한국에서 제가 도망자가 돼서 짐 싸가지고 야반도주한 사람처럼 루머가 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일본 야쿠자와 연결되었다는 소문도 돌았고요. 황당한 거죠. 그래도 전 자신이 있었죠. 지금도 저는 자신이 있어요. 일본가요계에 당당히 스카우트 돼서 온 거지 폼 잡으려고 일본에 온 게 아니기 때문 에, 한국에 가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장은숙 인터뷰 中 -
    일본 활동에 매진하면서 성과는 늘어갔지만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는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장은숙의 어머니는 그렇게 일본에 매여 있는 딸을 한평생 그리워 하다 돌아가셨다. 딸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어머니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딸이 못마 땅했다. 모진 말을 내뱉던 어머니가 미워 장은숙은 연락도 잘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의 기억들은 지금도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은 후회로 남아있다. 장은숙이 한국으로 돌 아온 건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였다.
    제가 지금도 가장 아쉬운 건 엄마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멸치 풀어서 된장국 드리면 진짜 감동하시고 거기다가 “소주 한잔 마십시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제가 너무 많이 못해드렸어요. 외국에서 바로 왔었어야 했는데. - 장은숙 인터뷰 中 -
    ∎ 나이가 믿기지 않는 동안 미모와 40년을 이어 온 노래 실력까지, ‘프로’다운 장은숙의 자기관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아왔던 그녀의 나이가 벌써 60이다. 하 지만 장은숙의 실제 나이를 들으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만다. 환갑이라고 믿기지 않 는 최강 동안의 미모 때문이다. 그녀의 동안 비결은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실천하는 생활습관. 자기관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노력한다.
    특히 그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노래다. 예전 그 장은숙의 목소리와 실력은 지금도 여전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성숙해지고 농후해졌다. 그녀는 산책길 에 올라 발성연습을 하고 무대가 있는 날이면 누구보다 철저히 대비를 한다.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후배 가수에게 적극적으로 조언해주는 선배의 모습까지 갖췄다. 40년 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여전히 현역일 수 있는 이유는 이렇듯 느슨함을 보이지 않는 프로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가요무대가 30년이 넘으면서 30년을 넘게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와 주신 가수 분 들은 그렇게 많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장은숙 씨는 가요무대 초창기부터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약이 많아 서 가요무대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는 가수입니다. 노래를 잘하잖아요. 노래를 못하면 가요무대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 KBS 가요무대 진행자 아나운서 김동건 인터뷰 中 -
    ∎ 도전하며 지내온 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아직 끝나지 않은 장은숙 의 가 수 인생
    너무나 바삐 달려온 지난 세월, 결혼도 미처 하지 못했다. 본인은 외롭다고 말하지 만 남들은 당당한 그녀에게 결혼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 도 포기하지 않고 가수의 꿈을 이뤄낸 어린 시절의 장은숙, 슬럼프에 지지 않고 일본 진출을 감행했던 중년의 장은숙, 이제 그녀는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그녀를 기 다리는 일본을 잠시 뒤로 하고 한국에서 더 많은 대중과 만나고 싶다는 것. 그 밑바 탕에는 장은숙의 꿈과 노래가 있다.
    저는 눈 감는 순간까지 꿈을 먹고 살다가 갈 것 같아요. 무슨 꿈이냐면 항상 아이돌처럼, 걸그룹의 한 일원이 된 사람처럼 마음을 가지고 무 대에 서는 것 같아요. 제가 언제 생을 마감할지는 모르지만 노래가 있기 때문에 저는 할 수 있는 날까지 꿈 과 나를 위한 투자를 하고 있는 겁니다. - 장은숙 인터뷰 中 -
    가수 장은숙은 어려운 상황들을 질긴 헝그리 정신으로 견뎌냈기에 한국과 일본 양 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평생을 노래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그녀 에게 천상 가수란 수식어는 아깝지 않다. 그녀의 인생 제3막, 끊임없이 펼쳐나가는 장은숙의 도전 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253회 2017-12-17

    현진영 Go 진영 Go ▶ 아픔을 딛고, 힙합의 전설이 된 소년
    90년대 한국에 힙합 열풍을 몰고 온 ‘레전드’ 가수 현진영! 후드 티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파격 자체였고, 젊은이들은 그의 춤과 패션을 따라하며 ‘현진영 Go 진영 Go’를 외쳤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댄서들이 실력을 겨루 던 이태원에서 불과 열여섯에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스무 살에 가요계의 최정상에 올 랐지만, 사실 그가 일찍부터 프로 댄서의 길을 선택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중학 생 때 어머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가장 아닌 가장이 된 그는, 낮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에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었다. 일찍부터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워 십대 때 두 번이나 차가운 한강에 뛰어 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그를 성장하게 했고, 삶의 경험 들은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에게 가장 큰 인기를 가져다준 <흐린 기억 속 의 그대> 역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만들어진 노래였다. 인생의 빛과 그림자 를 일찍부터 겪으며 굽이굽이 헤쳐 온 가수 현진영의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난다.
    “되게 프로다웠어요. 제가 살면서 춤을, 내 눈앞에서 턴을 열 세 바퀴를 파박 도는 걸 처음 봤어요. 그래서 와 이 친구 춤을 진짜 잘 춘다 했죠. 무지 열심히 했어요. 진짜 독하게 하긴 했죠. 가정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자기가 너무 좋아하니까. 자기가 너무 좋아하고, 춤추는 거랑, 그리고 춤만 잘 추고 싶지 않고 노래도 잘하고 싶어서 노래 연습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되게 좋게 봤어요.” ― 가수 구준엽 인터뷰 中
    “‘흐린 기억 속에 그대’를 만들고, 그게 사실 너무 운이 좋았는지 나오자마자 1등을 했어요. 2주 만에 1등을 하면서, 삶 자체가 망각으로 바뀌어 버렸어요. 예전에 힘들고 고생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눈 감고 뜨니까 신데렐라가 돼 있었다고 해야 될까? 너무 교만했어요. 나중에 3집 앨범 나와서 그것도 히트를 치고 있는데 또 사고가 난 거죠. 앨범 내고 한 달 만에. 그리고 모든 걸 잃었죠. 돈, 명예,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 아버지와 여동생 빼고 다 잃었던 거죠. 사람도 다 떠나고, 설 무대도 다 없어지고, 방송은 아예 아무 데도 못 나가고. 심지어는 밤업소도 저를 쓰는 데가 없었어요.” ― 현진영 인터뷰 中
    ▶ 공황장애와 파산까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를 지켜 준 아내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 수차례의 약물 파문으로 현진영의 인기는 물 거품이 됐다. 혹독한 슬럼프를 겪으며 그는 불면증과 우울증, 공황장애까지 앓았다. 그렇게 그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 오서운이 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는 아내는 18년째 한결같이 현진 영의 곁을 지켜 주었다. 거듭된 위기에도 아내의 변함없는 지지와 보살핌 속에 현진 영은 차츰 안정을 찾았고, 재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음악적 재능과 별개로 사업 수완은 부족했는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획사를 설립했던 사업에 실 패하면서 그는 또다시 파산이라는 위기를 맞는다. 13년의 만남 끝에 아내와 결혼식 을 올리고 나서 바로 이듬해였다. 인생의 힘든 고비들을 함께 건너온 현진영, 오서 운 부부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된다.
    “처음 만날 때 남편이 되게 안쓰럽고 그랬어요. 모든 사람이 안쓰럽다고 그 사람을 다 그렇게 챙겨 주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희 남편 같은 경우는 어느 날 만나고 나서 헤어지고 남편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세상에 남편 혼자 덩그러니 딱 떨어져 있는 느낌, 그 느낌을 딱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챙겨 줘야 되겠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던 것 같아요.” ― 아내 오서운 인터뷰 中
    “그런데 저희 와이프가 제 악기만 나중에 사줬어요. 압류가 붙은 상황에서 경매가 붙었을 때 돈을 구해서 다시 본인이 경매를 받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악기는 안 빼앗겼죠. 저한테는 소중한 악기죠. 악기가 없으면 음악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물론 가수니까 노래를 해도 되는데, 작곡가이기 때문에 무대에 서지 못 하면 곡을 만들어야 음악을 하는 거라고 와이프도 생각을 하니까, 저게 없으면 이 사람은 양 팔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기는 찾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 현진영 인터뷰 中
    ▶ 재즈 뮤지션으로 변신한 힙합 전사의 멈추지 않는 도전
    후회되는 일들도 아픔도 많았던 삶이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고마운 아내와 함 께하는 지금이 현진영에겐 더욱 소중하다. 소중한 일상을 지키고 경제적으로도 재기 하기 위해 방송 출연, 작은 공연과 강연, 인터넷 라이브 방송 등 가리지 않고 끊임없 이 노력하고 있다. 마흔 일곱이 된 ‘힙합 전사’ 현진영은 요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 다. 재즈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앨범을 발표하고, 그가 십대 때 힙합 댄스를 추 던 이태원에서 재즈 공연을 한다. 대중음악에 비해 수입은 적어도 재즈 클럽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영예로운 일이라는 그의 음악적 자부심은 역시 뮤지션이었던 아버지 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1세대 재즈피아니스트 故 허병찬이다. 죽 기 전까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무대에 서고 싶다는 현진영에게 아버지라는 큰 산 은 여전히 든든한 지원군이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그 리고 자신도 언젠가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바닥을 딛고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 는 가수 현진영의 음악적 열정과 인생 이야기, 사랑하는 아내와 알콩달콩 다투는 귀 여운 일상 속 매력까지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본다.
    “제일 행복할 때죠. 무대에서 노래할 때가. 제가 좋아하는 '숨'을 최고로 극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무대는. 무대는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 쉬는 숨으로는 안 되는 데잖아요. 힘껏 들이마시고 힘껏 내뱉어야 사람들이 알아듣는 장소가 무대잖아요. 그때 저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죠. 나는 살아 있어. 비록 내가 바닥까지 갔을지라도 여기 위에서만큼은 나는 최고야. 내가 살아 있는 곳이야. 그런 생각이 들어요.” ― 현진영 인터뷰 中
    “다시 예전의 정상의 인기를 찾을 수 있는 길이 꼭 있을 거예요. 그 기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것뿐이지. 그만큼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니까. 지금 시대에 코드가 조금 안 맞아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그런 것뿐이지 언더그라운드 재즈 클럽에서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같이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잖아요. 그게 대중적인 인기를 다시 갑자기 확 끌어내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지. 그러니까 언젠가는 또 기회가 오면 다시 크게 부각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가수 박남정 인터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