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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순

    회차 방송일 내용
    252회 2017-12-10

    세월이 준 선물 – 노사연 편 █ 데뷔 40년, 국민가수가 되기까지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로 화려한 데뷔를 치르며 신데렐라로 떠올랐던 가 수 노사연. 그러나 소위 ‘비디오 형’이라 불리던 뛰어난 외모의 가수들이 각광 받던 시대, 그녀는 상처를 받고 고심 끝에 메이저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에서의 활동을 펼 치게 된다. 1986년 1집 ‘님 그림자’를 발표하며 재기 아닌 재기를 하며 깊이 있는 색 깔을 가진 음악으로 주목을 받는다. 노래 뿐 아니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MBC ‘일요일일요일 밤에’의 엠씨로 활약하며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 을 알리던 그녀. 방송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던 ‘만남’이 우연치 은 계기로 히트를 치며 대중가수로서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
    “ 저는 가수로서는 좀 언젠가 내 때가 와야 되는데 내 노래가 언젠가는 내가 언젠가 한 번은 내 목소리로 정말 할 수가 있는데 그런 확신 같은 거 있죠. 그런 거는 있고 나 왜 이렇게 안 되지 어떡해 이런 초조함은 되게 없었던 거 같고요 어떡하지 내 목소리가 노래에 대한 그런 거는 크게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분명히 내 목소리로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해주는 노래가 나올 거라는 나 나름대로의 마음은 있었고요 ” - 노사연 int
    ‘만남’의 엄청난 히트 후 이무송과의 불타는 사랑으로 가수활동에는 비교적 뜸했던 그녀. 2015년 발매된 싱글 ‘바램’이 성인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가수로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데뷔 40년차 국민 가수 노사연. 그녀의 노래와 가정, 사랑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 40년 노래인생의 위기
    어느덧 데뷔 40주년을 맞이하게 된 노사연. 변함없이 자신을 응원해준 팬들의 성원 에 보답하고자 40주년 콘서트를 기획하며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큰 굴곡 없 이 안정적인 연예계 생활을 지속해 온 것 같은 그녀에게도 뜻하지 않게 찾아온 아픔 이 있었다. 50이 갓 넘은 나이에 급작스러운 청력 손상으로 인해 가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
    “ 제가 진짜 가수가 청력이 약해진다는 거는 정말 숨이 가빠지는 호흡 환자처럼 되게 좌절도 느끼고 처음에 진짜 이거를 많이 희화화시키고 내 나름대로 이제 지나가는 방법이고 실수를 해도 우리가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웃음으로 넘어가는 그런 부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냥 내가 말할 때 신경 안 쓰고 그냥 귀 나쁘니까 대충 이렇게 할 때 진짜 되게 그런 게 서운하거든요 “ - 노사연 int
    방송에서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곱지 않은 시선과 억측으로 인 해 많은 상처도 받았다는 그녀. 그러나 변함없이 곁을 지켜준 남편 이무송과 노래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인해 아픔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40년이라는 녹록치 않은 세월동안 변함없이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인 스스로 를 갈고 닦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 는 노사연의 모습을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의 다시 쓰는 신혼일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노사연은 돌연 깜짝 결혼발표를 알리며 대중들을 놀라게 한 다. MBC 대학가요제 출신의 후배이자 <사는게 뭔지>로 주목받던 가수 이무송이 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연상연하 커플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두 사람. 94년 혼인 이후 어느덧 24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연예계 대표 잉꼬 부부로 불리는 두 사람.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한 연만큼이나 쉽지 않았던 고비의 순 간을 맞은 적도 많았다.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던 노사연은 이무송의 개인적인 영역 과 시간을 용납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오해는 부부사이에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는 데...
    “ 나를 깎는 거야 결혼은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을 깎는 거더라고 내가 나를 깎아서 자꾸 나를 둥글게 만들면서 모나지 않게 어디든지 다 가는 거더라고. 결국은 나를 고치는 것이 결혼생활이지 우리남편을 내가 어떻게 내가 당신하고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 만나가지고 내가 어쩌고저쩌고 당신하고는 내가 맨날 이랬지만 그게 알고 보니까 다 내 탓이더라고 ” - 노사연 int
    각기 다른 생각 차에서 불거진 크고 작은 다툼으로 얼룩졌던 세월을 지나, 비로소 각 자의 삶을 존중하고 서로의 시간을 허락하게 되었다는 부부. 서로 신뢰하며 더 이상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넓어진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오 랜 세월을 견뎌낸 부부에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행복일 것이다. 노사연 이무송 부부 의 애정 가득한 일상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본다.

    251회 2017-12-03

    오춘기 박상면, 인생 후반전을 뛰다 ■ 쉬지 않고 뛰어온 인생 전반기, ‘마라토너’ 박상면의 연기인생
    1993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첫 연기 인생을 시작한 박상면. 어릴 때부터 친구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이며 연예인을 꿈꾼 소년은 자라서 25년간 국민들의 꾸준 한 사랑을 받는 연기파 배우가 됐다.
    “상면이는 내가 봤을 때도 재능이 있더라고. 노래도 거의 전문가 수준이고 예능성도 있지. 주변 사람을 아주 즐겁게 해 주잖아. 개그맨 뺨칠 정도로 말솜씨도 좋고.” - 이덕화 인터뷰 中
    “전교 응원단장, 반 오락 단장 그걸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 까지 군대 가서 까지도 단 한 번도 빼앗겨 보질 않았어요. 옆에서 선배님들이나 선생님들이 많이 예뻐해 주셔서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빼앗겨 보질 않았어요, 단 한 번도.” - 박상면 인터뷰 中
    어머니 친구 분들이 놀러올 때마다 밥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렸던 꼬마 는 시트콤 <세 친구>에서 끼를 그대로 발산해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영화 <넘버 3>, <달마야 놀자>, <조폭마누라>, 드라마 <왕초>, 시트콤 <세 친구> 등 60여 개 의 작품에서 감초 역할을 책임져온 그가 어느덧 데뷔 25년차를 맞았다. ‘연기파 배 우’ ‘명품 연기’ ‘믿고 보는 배우’ 등 다양한 수식어를 얻으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 연예인을 꿈꾸던 그 순간부터 25년 동안 배우의 길을 달려온 그의 이야기를 < 사람이 좋다>에서 들려준다.
    ■ 처음 맞이한 공백기 8개월 - 신발끈 고쳐 묶고, 다시 달릴 준비
    ‘재떨이’, ‘하마’, ‘박창주’, ‘양인목’ 등 긴 연기 인생만큼이나 맡았던 배역도 많았다. 한편 그렇게 열심히 달려와 맞이한 51세라는 나이가 그에겐 많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삼촌을 하기에는 나이 든, 아버지를 하기에는 젊은 51세라 는 애매한 나이이기 때문에 8개월 동안 뜻하지 않은 공백이 생겼다. 연기 인생 처음 으로 맞이하는 공백기를 그는 어떤 방식으로 헤쳐 나갈까.
    “지금도 미안한 게 제가 우리 딸 데리고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 단 한 번도 가보질 못 했거든요. 그런데 쉬면서 우리 딸하고도 여행도 한 번 다녀왔어요. 아내도 항상 말해요. 급히 생각하지 말라고. 마음을 비우고 갈고 닦고 기다리면 꼭 다시 한 번 기회가 오거든요. 전 그걸 믿고 있어요.“ - 박상면 인터뷰 中
    누구나 맞이하는 50대, 모두가 넘는 인생의 문턱이기에 위기가 아닌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려 한다는 박상면. 그는 25년 간 달려오며 불렸던 모든 이름들을 잠시 내려놓 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 일상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다. 친구들이 준비한 깜짝 생 일파티, 가족과 함께 처음 해본 김장, 10년 이상 함께해온 연예인 축구단 ‘일레븐’ 단 원들과의 즐거운 경기까지 <사람이 좋다>에서 공개한다.
    ■ 내 인생의 하나 활력소를 꼽는다면, 단연코 가족
    형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7년 열애 의 결실을 맺었다. 결혼과 동시에 딸 윤진을 얻고 영화 <넘버3>의 재떨이 역을 완벽 하게 소화하며 충무로의 샛별로 떠올랐다. 박상면이 기나긴 인생 마라톤을 하는 동 안 묵묵하고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 건 그의 아내였다.
    “저희 딸은 우리 와이프가 다 키웠죠.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부터 학원 데리고 다니는 것 까지.. 딸이 한국에 있을 때는 제가 한창 바쁠 때라 애를 돌보지 못 했거든요. 와이프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아내가 저도 잘 챙겨줘요. 제가 새벽 4시에 촬영을 나가면 그 때까지 안 자다가 따뜻한 차를 우려 줘요. 아내는 그때 자요. 밤낮이 바뀌는 거죠 제가 촬영을 할 때엔.” - 박상면 인터뷰 中
    어느덧 22살이 된 딸을 둔 가장 박상면. 부모가 되니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 었다.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간 병원에서 가슴이 내려앉음을 숨길 수가 없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부모님을 보면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는 그.
    “나이 드신 분들은 하루하루가 다르다니까요. 다음 날 하루가 그 전날이랑 너무 다른 거예요. 그래서 살아 계실 때 잘 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버지 들어가세요.’, ‘엄마 들어가세요.’ 하고 돌아서는 뒷모습만 봐도 울컥 해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는 박상면과 중년이 된 아들이라도 여전히 애정 가득한 부모님과의 일상까지 <사람이 좋다>가 함께 한다.

    250회 2017-11-26

    백전무패를 꿈꾸는 서른다섯, 김상혁! ■ 체면을 버리고 마이크 대신 전단지를 쥐다.
    데뷔 후 수많은 소녀 팬들을 몰고 다니던 원조 꽃미남 밴드 클릭비. 1세대 아이돌로 서 전성기를 누리던 그들 중, 거침없는 입담과 솔직한 매력으로 예능에서 맹활약했 던 멤버가 있었다. 바로 ‘김상혁’이다.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쉴 틈 없이 바빴던 그 에게 여의도는 즐거운 일터였다. 연예인으로서 여의도에 뼈를 묻을 줄 알았다던 김 상혁은 어느새 체면을 버리고 길에서 전단지를 건네는 식당 사장님이 되어있었다.
    “번번이 복귀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서 실패하고 마냥 기다리다 보니까 또 집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어머니나 형한테 누가 되는 것 같고 혹시 방송을 영원히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내 앞가림을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 김상혁 인터뷰 中
    ■ 음주운전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12년... 가족이 있어 무너지지 않았던 김상 혁
    2005년, 김상혁의 나이 스물셋. 인기 정상에서 벌어진 음주운전 사건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잘못된 발언이 큰 화를 불러일으켰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에 대중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큰 사랑을 받았기에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여러 번 복귀를 시도했으나 쏟아지는 악플로 방송 출연이 무산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복귀 할 때마다 실패하고 그게 또 반복이었어요. 아직 많은 분이 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는구나 느꼈죠. 내 탓이니까 받아들이자 그냥 기다려보자 난 나대로 또 열심히 살아보자. 포기한다기보다 조바심을 갖는 거보다 그냥 기다렸어요.” - 김상혁 인터뷰 中
    음주운전 사건으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졌다. 사건 후, 어머니 역시 사람들의 시선 이 두려워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 된 것이기에 김상혁은 가족들에게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 니의 잔소리를 듣고 살았던 김상혁. 그렇다 보니 점점 어머니와의 대화도 줄어만 갔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살고 있던 집과 모든 부동산을 정리 하게 되자 김상혁은 어린 시절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마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제가 힘들어지고 집에 일이 생겼을 때 아버지조차도 밉더라고요 왜 내 옆에 없는지 근데 그건 또 이기적인 거잖아요 여유가 없다 보니 아빠조차 미운 절 봤을 때 이런 못난 놈이 있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말을 한번 듣고 싶어요 괜찮냐고” - 김상혁 인터뷰 中
    10년 넘게 조심하란 잔소리와 질책만 듣고 살았던 김상혁.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라도 위로가 받고 싶다. 김상혁이 웃음을 찾게 된 건 1년 전, 형이 결혼하고 조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조카가 태어난 후, 가족 간의 대화 가 이어지고 집안엔 웃음꽃이 피게 됐다. 자신으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낸 가족과 세상에 태어난 조카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 다짐하는 김상혁.
    “우리 엄마랑 형이랑 형수님 또 조카... 제가 나쁜 생각 안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들? 약해지거나 포기하거나 이런 안 좋은 생각들 안 하게 되는 원인이고 제 삶의 모터죠 모터“ - 김상혁 인터뷰 中
    ■ 기다림을 배웠지만 포기는 없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와는 달리 가끔씩 들어오는 방송 일을 제외하면 현재 김상혁 의 고정스케줄은 라디오 하나뿐이다. 이제는 카메라 앞에 서야 할 곳이 무대가 아닌 관객석이어도 그는 묵묵히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곤 한다.
    “방송 흐름상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주가 아니더라도 제가 있으면 뭔가 좀 좋은 그림들이 나올 거라는 자신감은 있거든요.” - 김상혁 인터뷰 中
    김상혁은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클릭비의 월 차’라는 웹 예능 방송을 시작으로 대중에게 먼저 손을 내밀려 하는 김상혁. 앞으로 도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말한다.
    “SNS 웹 예능을 통해서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소통하는 게 저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최선일 수도 있고 최선의 소통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요즘 너무 신나요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소통을 다시 했지 대중 여러분들과 고맙더라고요.” - 김상혁 인터뷰 中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인기 정상의 자리에 섰지만 음주운전 사건으로 한순 간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김상혁. 반성과 깨달음이 공존했던 12년이라는 시간은 욕 심과 체면을 내려놓은 지금의 김상혁을 만들었다. 새로이 도약을 준비하는 인간 김 상혁의 이야기는 일요일 오전 7시 50분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249회 2017-11-19

    이길 수 없는 시련은 없다 가수 김민우 ∎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 희귀병으로 1주일 만에 세상 떠나
    1990년, 데뷔 3개월 만에 톱스타 가수가 되었다가 지금은 자동차 딜러로 살고 있는 김민우. 지난 7월 갑자기 사망한 아내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아 내의 병명은 애초 ‘대상포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희귀질환인 ‘혈구탐식성 림 프조직구증’. 평소 건강했던 아내를 순식간에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아내는 발 병 7일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계속 검사가 이루어졌어요. 많은 검사와 많은 약물. 중환자실에 있는데 위에 매달려있는 것만 20가지. 그걸 계속 보고 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계속 보고 싶고, 너무 그립고…. - 김민우 인터뷰 中 -
    아내는 6살 연하의 회사원이었다. 가수 김민우가 아닌 자동차 영업사원이던 시절, 김민우는 아내의 헌신과 사랑에 반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아내가 고통스러워 하며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맞닥뜨리게 되는 아내 의 빈자리, 딸 민정(9)의 뒷바라지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눈물 한 번 제대로 흘리 지 못하던 김민우는 홀로 찾은 아내의 묘소 앞에 끝내 눈물을 터뜨린다.
    ∎ 데뷔 3개월 만에 화려하게 오른 정상의 자리, 그러나 잇따른 실패와 절 망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김민우는 대원외고에 들어간 뒤 음악에 빠져들었다. 결 국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고 경원대학에서 헤비메탈 밴드의 싱어로 활동하던 중 우연 히 앨범 제작의 기회를 잡게 된다. 작곡가 하광훈, 작사가 박주연, 그리고 가수 윤상 의 도움으로 3년간의 처절한 훈련 끝에 내놓은 1집 앨범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 다. ‘사랑일뿐야’, ‘입영열차 안에서’가 연이어 골든컵을 수상하며 무명의 신인가수 김민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활동 3 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훈련소에서 이제 불침번 같은 거 서잖아요, 저희들. 교육대에서 한 달간 생활을 하는데 야간 불침번을 서다가 밤에 그때, 가요톱10이라는 프론데 궁금한 거예요. ‘입영열차 안에서’가 후속곡이었는데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는데 딱 보니까 1위가 된 거예요 제가 없는데. 갑작스런 입대가 굉장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기가 있는데 군대를 갔다 오더라도 복귀하면 이 인기를 다 원상 복귀할 수 있을 거다, 라는 생각도 한편으론 하고 있었죠. - 김민우 인터뷰 中 -
    가요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2년, 김민우의 제대 시기와 맞물려 ‘서태지와 아 이들’이 데뷔했다. 가요계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고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온 힘 을 다해 3개의 앨범이 더 만들었지만 연달아 실패하고, 노래할 무대를 찾아다니던 김 민우는 대출을 받아 녹음실을 차렸다. 그러나 그 녹음실을 화재사고로 잃게 되고, 수 억 원의 빚과 함께 신용불량자가 된 김민우는 끝내 추락하고 만다.
    당장의 생계를 고민하던 그 때, 그가 선택한 것은 외제 자동차 영업사원. 화려한 무 대를 뒤로 하고, 전단지와 명함을 들고 거리에 나섰던 김민우에겐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저에게는 연예인 고객님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반 고객님들이 90퍼센트 이상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처음에 왔을 때 오히려 더 밖에 나가서 외부에서 영업을 많이 하고 많이 돌아다니고요. 고객 한 명을 만나기 위해서 그 분의 마음을 얻고 위해 길거리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명함을 돌리고 그랬어요. 집에 돌아가면 새벽 네 시 이정도 되는 거죠. 그러면 완전히 누우면 아침에 못 일어납니다. 그래서 앉아서 자요. 재킷만 벗어놓고, 셔츠랑 타이만 풀어놓고 자는 거예요. 앉아서 자고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고 또 계속 그런 일정들. - 김민우 인터뷰 中 -
    2006년부터 시작된 판매왕 행진. 한 달에 외제차를 열 대씩 팔았던 그의 기록은 지 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1년 반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생활은 안정권에 접어들었 다. 그는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어내던 그 때의 가슴 부듯함을 잊을 수 없다.
    신용카드 발급 받으면 노란색으로 붙어 있잖아요. ‘본인 외에는 개봉하지 마시오’ 이런 것 있고요. 쫙 뜯고 ARS 눌러서 카드 등록하잖아요. 그거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었을 거예요 신용이 다 회복이 됐고 빚을 다 정리를 했는데 너무 바쁘니까 그것도 모르고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처음에 백만 원이었다가 그게 천 단위였다가요 나중에 억 단위까지 올라갔는데 9천 9백만 정도 통장에 잔고가 있을 때 아침에 ‘입금되었습니다’ 문자가 오는데, 잔액이 1억이 넘어갔더라구요. 그 때 그 느낌. 정말 새로웠어요. 돈 만원 들고 삼사일을 살던 내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산다는 느낌. - 김민우 인터뷰 中 -
    ∎ 오뚝이 인생 김민우에 찾아온 또 한 번의 시련, 아내 사별 이후 100일. 딸과 어머니, 그의 삶을 위한 슬프고도 처절한 몸부림
    작년 6월 김민우는 20여 년 만에 새 노래 ‘푸르다’를 발표했다. 아내가 너무나 좋아 했던 노래였다. 지금 김민우는 아내와 딸 민정(9)을 위해 또 다른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오랫동안 가요계를 떠나 있었던 그를 도와주는 건 대학교 헤비메탈 밴드 선배 였던 가수 김정민. 김정민은 김민우가 가수의 길로 이끌었던 인연도 있다.
    김민우가 저를 또 가요계로 이끌어주신 분이에요. 군대에 있을 때 ‘입영열차 안에서’를 들으면서, 김민우 씨의 유명세를 보면서 ‘난 지금 여기서 침상 닦고 있는데’ ‘아 부럽다’ 신세한탄도 했었죠. 제대하고 민우한테 사인을 받으러 갔다가 거기 제작자 분들을 소개시켜 줘서 제가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은인 같은 후배에요. - 가수 김정민 인터뷰 中 -
    김민우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또 한 선배는 부활의 기타리스트 김태원. 자동 차 영업사원 시절 친분을 쌓은 김태원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과거에 명성에 매달 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김민우를 보고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지금 또 한 번의 시련 앞에서 김태원은 그에게 음악을 권유한다.
    도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갖고 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인생의 좌절과 성공을 모두 겪어봤으니, 어쩌면 음악인의 자격을 얻었다고 볼 수 있죠. 삶을 애기할 수 있는, 인생을 노래할 수 있는 자격. 이 친구는 슬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음악을 해야 되요. 음악을 통해 민우도 치유 받아야 해요. - 기타리스트 김태원 인터뷰 中 -
    화려한 가수 데뷔 이후 재기에 실패하고 성공한 자동차 딜러가 되기까지 김민우는 여러 차례 고비를 넘어왔다. 갑작스러운 아내와의 이별은 지금 그에게 찾아온 또 다 른 시련이다. 고통스럽고 아프지만, 이겨내기 위해 달리고 있는 감동적인 김민우의 인생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248회 2017-11-12

    고생 끝 행복 시작, 김학래 임미숙 부부 ▶ 원조 개그맨 부부 김학래 임미숙, ‘각서’의 아이콘이 되다
    개그 프로그램이 시청률 40~50%를 장악하던 80년대, '저는 회장님의 영~원한 종입 니다. 딸랑딸랑딸랑~', '괜찮아유~',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여’ 등 구수한 입담으로 숱 한 유행어를 제조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감초 개그맨 김학래! 당대 최고의 개그 프로 그램인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 자키>뿐만 아니라 수많은 CF에도 출연하며 미 녀 개그우먼으로 유명했던 임미숙! 특히 임미숙은 동료 개그맨들 사이에서도 인기 가 많았는데, 김학래의 열렬한 구애 끝에 이들은 10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결혼에 골 인했다.
    “저는 교회를 안 나가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개그맨실에서 엄청 큰 검정 책을 옆에 딱 끼고 와서는 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빠 이거 뭐예요? 했더니 영어로 ‘바이블’, ‘나를 베드로라 불러다오’ 그러면서 매일 저한테 와서 오늘의 설교 말씀은 이거야, 나는 이제 예수님을 영접 했어 계속 그러는 거예요.” ― 임미숙 인터뷰 中
    “퇴짜 맞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죠. 온갖 유행가 가사가 다 나를 위해 만든 것 같고. 그래서 몇 개월 만에 연애편지도 쓰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귀찮게 했죠. 최양락한테도 얘기하고, 이경애한테도 도와 달라 얘기하고, 그 결정체가 오늘의 우리 부부예요.” ― 김학래 인터뷰 中
    하지만 신혼 초부터 이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생각처럼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부터 김학래는 아내의 속을 썩일 때마다 잘못을 반성 하고 용서를 구하는 각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 둔 각서가 100여 장을 헤아린다. 과거에는 아픈 기억이었지만 이제는 이것도 연애편지와 함께 추억처 럼 말할 수 있게 됐다는 부부. 여전히 아옹다옹 하며 삶의 재미와 행복을 함께 찾아 가는 김학래 임미숙 부부의 인생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본다.
    ▶ 달라도 너무 다른 부부, 연이은 사업 실패에 잇따른 아픔
    거리의 낙엽 한 장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가득한 임미숙과 성 실하고 우직하게 ‘마이 웨이’를 걸어 온 김학래. 나이 차이만큼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들 부부는, 각자 바라는 가족의 모습도 많이 달랐다. 6남매 중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 고 자란 임미숙은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을 기대했지만, 장남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와 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한 남편 김학래는 그녀의 기대를 번번이 좌절시켰다. 아내는 남편과 더 많은 것을 함께하기를 바랐지만, 무엇보다 가장으로서 경제 활동 에 충실하고자 했던 남편은 그런 아내의 요구가 때로는 버거웠다. 한편 결혼 초기 부부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도 순탄하지 않았다. 피자집, 고깃집, 라이 브 카페 등 도전했던 사업마다 번번이 실패했고, 김학래가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까 지 연이어 당하면서 부부는 수십억의 빚을 안고 파산 위기에 몰려 힘든 시기를 보내 야 했다. 결국 거듭된 위기로 인해 임미숙은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앓게 됐고 방송 활동마저 접었다. 공황장애가 병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 곁에 있 는 남편조차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고, 가족들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 한다는 사실은 임미숙을 더욱 슬프고 힘들게 했다.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8년 만에 함께 방송에 출연한 김학래 임미숙 부부의 진솔한 이야기가 <사람이 좋다>에서 공 개된다.
    “비행기 타는 거는 생각도 못 하고, 어디 갇혀 있는 거는 더욱더 무서워서 엘리베이터를 못 타겠는 거예요. 어느 날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혹시 너 어디 아파? 그 말을 10년 만에 했어요. 혹시 너 어디 아파? 그때 눈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가게 된 거예요. 사람이 어디가 아프면 나 아파 하고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이거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니까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숨기다 보니까 본인은 죽겠어도 남들은 잘 모르는 거 같아요.” ― 임미숙 인터뷰 中
    “나는 공황장애가 뭔지도 모르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 방법을 잘 몰랐죠. 그렇게 세월이 많이 지나갔어요. 그걸 이해하고 지금은 공황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카운슬링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됐는데도, 인간이기 때문에 또 잘 안 되더라고요. 아 내가 또 잊어버렸네, 아내가 아픈데 갑자기 또 소리를 질렀네 하면서 바로 또 후회하고.” ― 김학래 인터뷰 中
    ▶ 연매출 100억대 사업가로 변신한 부부의 인생 제2막,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여 ~’
    김학래 임미숙 부부가 28년차 부부로 여전히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믿 음을 지켜 냈기 때문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씩 맞춰 가려 노력하면서 마 음에 안정과 평화가 찾아왔고, 임미숙의 공황장애도 서서히 치료됐다. 경제적으로 재기하기 위해서도 부부는 쉬지 않고 함께 노력했다. 김학래는 30여 년 간 꾸준히 해온 방송 활동 및 각종 행사 진행, 강연에 부지런히 다녔고, 임미숙은 부 부가 새로 창업한 중식당 운영에 전념했다. 과거의 실패 경험을 밑거름 삼아 부부의 삶을 일으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창업한 중식당은, 좋은 음식 재료와 맛, 손님 한 명 한 명의 취향과 특징, 심지어 화장실 청소까지 직접 챙기는 임미숙의 살뜰한 노력 덕분에 꾸준히 성장했다. 또한 자체 개발한 메뉴를 홈쇼핑에 런칭하면 서 부부는 연매출 100억 원까지 달성했고, 마침내 10여 년 만에 남은 빚도 다 갚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지금 현재 제가 하는 사업을 보고 성공한 사람, 성공한 CEO라고 얘기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참 많은 대가를 치렀어요. 결국 지금에 와서 성공한 건 아내가 옆에서 힘을 북돋아 주고, 서둘러서 손님을 맞이하고, 손님들과 얘기 나누고, 음식을 개발하고 이러면서부터예요.” ― 김학래 인터뷰 中
    성공한 사업가로서 인생 제2막을 꽃피우고 있는 김학래 임미숙 부부. 아픔을 이겨 낸 부부는 자기를 고집하기보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며 나누고 함께할수록 삶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여전히 남편이 아내보다 드라마에 더 집중해서 아내의 마음을 서운하게 할 때도 있지만, 시련을 딛고 지켜 낸 가족이기에 부부에게 지금의 행복은 더욱 값지다. 옥신각신하면서도 서로의 곁을 든든하게 지 켜 주고 있는 김학래 임미숙 부부의 인생 스토리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 본다.
    “사실 옛날에는 무조건 엄마 편이었는데, 지금 보면 엄마는 따뜻하고 아빠는 이성적이고 서로의 장단점이 있는 거 같아요. 두 분이서 시간을 조금 더 알차고 즐겁게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제일 크고, 엄마가 공황장애를 다 치유하시면 제가 서른 되기 전에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입니다.” ― 아들 김동영 인터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