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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차 방송일 내용
    777회 2018-06-11

    6월항쟁 특집 : 어머니와 사진사 ■ 기획의도
    1987년 6월, 독재 권력의 억압에 맞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날 그 거리. 그 거리에는 직격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결국 눈을 감은 학생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의 역사를 취재하던 푸른 눈의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오늘. 거리의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미국의 한 대학 교수가 되 었고 보통의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거리의 투사가 되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바라본 87년의 6월은 어땠을까? 6월항쟁 특집, ‘어머니와 사진사’에서는 이들이 기억하는 그날의 6월 과, 이들이 살아온 31년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주요내용
    ◇ 미국인 사진작가 킴 뉴턴(Kim Newton) 이야기
    1985년 당시 미국인 사진작가 킴 뉴턴(Kim Newton)은 <르 피가로>, <타임>, <뉴 스위크> 등의 유명잡지사를 위해 일하는 도쿄 주재 특파원이었다. 그는 1988년 서 울 올림픽으로 한국이 세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1986년 봄, 한국 관광홍보 사진을 찍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 외국인들이 갈만한 제주도의 관광지 사진이나 한국의 경제 발전상황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산업단지와 공단을 찍던 그는, 1987년이 되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이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자 취재를 위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처음 시위 사진을 찍으러 간 날, 그는 방독면이 없어 눈 에 최루가스를 가득 묻힌 채 사진을 찍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그는 다음날 바 로 이태원 암시장에서 방독면을 사 왔다. 그리고 여느 기자들과 다름없이 방독면을 쓰고 서울의 시위 현장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매일매일 빠짐없이 서울의 시위 현장을 찾았다. 노태우가 대선 후보로 선 출된 민정당 전당대회에도, 6·10 국민대회가 열린 그 거리에도 그는 현장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취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루탄을 맞은 22살의 젊은 학생이 결 국 세상을 떠나버린 날에도 킴 뉴턴은 연세대학교 앞에서 이한열을 애도하는 학생들 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한열을 살려내라”
    연세대학교 앞은 전경들과 학생들로 가득했고 학생들의 외침에는 슬픔과 분노가 뒤 섞여 있었다. 외침이 멈추고 친구 이한열을 애도하는 묵념과 함께 바람이 불기 시작 했다. 바람에 한 학생이 든 태극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킴 뉴턴은 바람이 태극기 를 펼쳐 주기를 기다렸고 완벽한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바람이 만들어준 이 사진은 유명 시사주간지 U.S. News and World Report에 ‘이주의 사진 (Photo of this week)’으로 선정되어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을 전 세계에 알렸다. 훗날 사진 속 영정 을 든 총학생회장 우상호는 국회의원이, 태극기를 든 사회부장 우현은 유명한 배우 가 되었다.
    그리고 2017년, 그가 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30년 만의 서울은 최루탄 대 신 촛불로 물들어져 있었다.
    “저는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주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 시위대가 여기 나와서 시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거죠. 촛불시위든 태극기 집회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기 뜻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지금이 1987년이었으면 이곳은 최루가스로 자욱했을 거예요” - 킴 뉴턴, 2017년 3월 시청광장에서
    2007년 모교의 교수가 된 킴 뉴턴이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6월항쟁 30주년’을 맞은 작년이었다. 제작진은 1987년 6월항쟁부터 2017년 촛불집회까 지, 이방인인 그의 눈으로 본 한국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 기 위해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MBC 경영진에서 ‘6월항쟁 30주년’ 다큐멘터리 제 작을 중단시켰고 결국 그의 이야기는 2017년에 방송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 해가 지 나, 마침내 그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고 삶이 180도 변한 어머니, 배은심 이야기
    배은심 여사는 아무 걱정 없던 어머니였다. 아들과 딸들이 공부 잘하고 또 건강하게 잘 크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생긴 비극 적인 사건으로 평화롭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버렸다. 아들 한열이는 최루탄을 맞아 쓰러져 27일 만에 눈을 감았다. 아들을 묻고 다섯 해 가 지난해에는 남편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거기서부터 태어난 것 같아요 저는. 그때 내 나이 마흔아홉이었는데 마흔아홉 먹은 나이는 없어진 거고... 나는 거기서부터 태어난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 왔어요” - 배은심 인터뷰 중
    지금 배은심 여사는 광주와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유가협’) 회원들이 살고 있 는 ‘한울삶’을 오가며 살고 있다. 배은심 여사는 ‘한울삶’이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 라고 말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식을 잃은 것, 자식이 땅속에 들어 간 것이다. 그래서 ‘한울삶’의 한쪽 벽에는 열사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이 사진 속 아이들은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한울삶’ 가족들 모두의 자식이다.
    “이한열을 망월동에 묻어 놓고 제2의 장소가 이 집이 돼버렸어요. 저는 이 집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 쓰러진 친구를 지키던 평범한 학생 우석훈 이야기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그날은 유독 최루탄이 많이 터지던 날이었다고 한 다. 당시 경제학과 2학년 학생이던 우석훈은 평소와 다른 최루탄 소리에 놀라 학교 안 분수대까지 달려가 몸을 피했다. 분수대 옆 잔디에 누워 숨을 고르던 도중 누군가 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게 길었던 한 달의 시작이었다. 그날부터 우석훈과 친구들은 전경으로부터 쓰러진 한열을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실 앞을 떠나지 않았 다.
    “대학교 2학년 땐데, 10미터쯤 됐을 거예요. 앞에 있던 친구가 죽었죠 거기서. 그때는 그게 오래갈 기억일지 사실은 몰랐어요. 서른이 넘고 마흔이 됐는데도 문득문득 한열이가 쓰러졌던 그때 ‘누군가 쓰러졌다’ 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던 그 자리로 가있는 기분이 들고는 해요. 그 사건은 이제 제 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고 제 삶의 한 부분인 것 같아요” - 우석훈 인터뷰 중

    776회 2018-05-28

    누운 배, 94일의 기록 ■ 기획의도
    2018년 5월 10일 오전 9시 누운 배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다 속으로 가라 앉은지 1,486일만이었다.
    2017년 10월 27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선체 직립 추진' 안건을 의결했 다. 목포 신항에 거치된 지 6개월만의 결정이었다. 초기에 당국은 객실 부위를 절단 해 직립시킨 후 조사하는 방식을 검토했지만, 미수습자 유골 유실, 선체 변형 위험, 진상규명 근거 훼손 등 반대 여론은 거셌다. 누운 배로부터 네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고 위험했다. 미수습자 수색과 침몰 원 인에 대한 선체조사가 다시 벽에 부딪혔다. 배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더는 앞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눈과 귀가 한데 모아졌던 5월 10일 누운 배가 다시 일어난 그날의 기록이자, 배를 일으키기 위해 분투했던 94일간의 땀과 이날이 있기까지 4년을 버텨 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주요내용
    ⓵ 4만 8천톤 크레인이 1만 4천톤 배를 일으켜 세우는 지상최대의 작전
    “울산에서 목포까지 232킬로미터를 19,400마리의 말이 3박 4일 동안 끌고 갑니다.” - 1만톤 해상크레인 선장 강희복
    5월 1일 울산 현대 중공업 앞 바다에 국내 최대 규모인 1만 톤급 해상 크레인이 출항 했다. 길이 182M, 폭 70M, 무게 48,874톤에 달하는 세계최대 크레인 중 한 대. 크레인의 목적지는 목포 신항. 바다가 허락한다면 5월 5일 아침에는 목적지에 닿을 것이다. 그곳에는 1만 4천톤으로 추정되는 ‘누운 배’가 기다리고 있다. 5월 5일 오후. 목포 신항 앞바다에 1만 톤 크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레인의 거대한 양팔에는 256줄의 와이어가 달려있다. 이 와이어를 배와 연결해 90 도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선체를 일으킬 것이다. 파도와 바람까지 도와주어야 가능 한 작전이다.
    ⓶ 1만 7500명의 기술자들
    “여기가 작년 4월 21일에 가장 먼저 수색했던 곳인데 뻘이 3, 4미터 차 있었어요. 그 걸 사람 힘으로 수습해서 여기 협착부만 남았는데 눈앞에 교복이 있는데도 사람 힘 으로 꺼낼 수가 없어요” - 오승래 선체조사위원회 조사관
    A데크 좌현 남학생 객실, 천장이 45도 밀고 들어와 바닥과 협착되어 있었고 그 사이 에 체크무늬가 선명한 교복이 끼어 있었다. 어느 부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죽은 자식의 물건, 일 년이 지나도록 주인을 찾아 줄 수가 없었다.
    “기관구역에서 지난해 10월 미수습자 유해가 발견되었어요. 와류현상에 의해 미수습 자 유해가 쓸려 내려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정일 선체조사위원회 사무처장
    돌아오지 못한 다섯 명이 배 어딘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기관구역에 대한 수색 역시 배를 세우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다.
    세월호 직립은 세단계로 진행되었다. 바다와 90도로 누워있던 배를, 바다와 평행을 이루도록 돌려 뉘우고, 직립을 하기 위해 구조보강작업을 하고, 1만 톤 크레인으로 바로 세우는 것이다. 2월 21일 배가 바다를 향해 돌아누웠다. 선체 인양 이후에는 내부 수색과 선체 보존 을 위해, 이동 후에는 직립 시 외부 충격 완화를 위해 2,950톤의 철제빔이 동원된 보 강작업이 이루어졌고 하루 평균 185명, 연인원 1만 7500명의 기술자들이 동원되었 다.
    “작업장으로 출근하는 아침마다 (입구에 전시된 세월호 아이들) 사진을 봐요. 그러 면 가슴이 먹먹하고.. 그 사진을 보면서 별이 돼 버렸다, 별이 되었다 그 말이 왜 그 렇게 마음에 와 닿던지.” - 최태욱 반장 (건조1부)
    “우리는 항시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분들(유족들)은 항시 웃고 다니시 더라고. 그래서 ‘저분들은 뭐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들의 웃음은 바로 눈물 이었다는 것을 인자 와서 조금씩 느끼는 것 같습니다.” - 박현재 기원 (건조1부)
    “부모님들의 그 마음은 누구도 얘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분들에 게 조금이나 보탬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상은 현장소장
    ⓷ 영점의 회복
    “아들이 사진으로 왔잖아요. 진짜 우리 아들이 와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집에 못 온 이유는 내가 알아야 하잖아” - 건우(단원고 2학년 5반) 엄마
    선체 직립이 진행되는 동안 세월호는 4주기를 맞았고, 합동분향소가 문을 닫았다. 아 이들의 영정사진과 소지품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건우의 영정사진도 집으로 돌아왔 다. 건우 방에는 건우가 쓰던 드럼과 베이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건우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100만원이 넘는 드럼을, 40만원이라고 둘러대서 사주었 던 건우 아빠는 그동안 혼잣말이 늘었다.
    “이제 목포를 가거나 어디를 가거나 가면서 그냥 혼잣말로 얘기하고 가요. 뭐 야, 건 우야, 아빠 지금 화장실 가고 싶은데 다음 휴게소 들릴까? 아니, 들리는 김에 밥이나 먹자. 넌 뭐 먹고 싶냐? 그런 얘기도 하고... 왜, 자식은 마음에 담는다고 가슴에 담는 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가슴에 담기조차도 미안해서 아직까지는.” - 건우 아빠
    5월 10일 오후 12시 10분, 세월호가 다시 섰다. 새벽 두시부터 일어나 바다 상황을 체크했던 크레인 선장의 굳은 어깨가 풀어졌고 하얗게 침이 말라 붙은 현장소장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유가족들의 젖은 눈꼬리에도 주름이 잡혔다.
    네 번의 봄이 지나고 세월호가 다시 섰다. 건우엄마가 말했다.
    “우리는 울면 안돼. 이제 시작이야”
    바로 선 세월호 안에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775회 2018-04-26

    남북정상회담 특집 다큐 <테이블 너머의 김정은> 남북정상회담 D-1. 불과 작년, 핵 실험으로 얼어붙었던 겨울을 지나 평화의 희망이 싹트는 2018년 한반도의 봄. 11년 만에 남과 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다. 한반도 의 평화를 위해 가장 가까이 마주 앉아야 할 김정은. 그런데 우리는 김정은과 북한 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권력을 위해서라면 고모부와 형도 죽이는 광기어린 독 재자? 핵무기를 등에 업고 세계를 위협하는 ‘꼬마 로켓맨’? 특집 다큐 ‘테이블 너머 의 김정은’에선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김정은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 다. 이를 위해 중국, 스위스를 긴급 취재하고 북한의 최근 모습을 공개한다.
    중국 : 김정은의 달라진 행보
    북경의 교통이 통제됐던 지난 3월 26일.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김정은과 시진핑. 예 상치 못했던 중국 방문으로 남한과 미국, 중국까지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인 김정은. 제작진은 성대한 의전 속에 이루어진 김정은의 중국 방문 동선을 직접 따라가면서 그가 중국을 방문한 진의를 분석해본다. 지금의 대화 분위기가 대북제재로 얼어붙 은 북중 접경지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단둥 현지에서 듣는 생생한 이야 기까지. 은둔의 정치를 끝내고 연이은 국제 행보로 외교 무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김정은, 그의 달라진 행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위스 : 김정은 그는 누구인가?
    지난 1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대비해 남북 선수단이 공동 훈련을 했던 마식령 스키장. 김정은이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는 마식령 스키장과 스위스 유학 생활에는 어떤 연관 성이 있을까. 박운이라는 가명과 외교관 아들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동생 김여정과 4 년여의 스위스 유학 생활을 했던 김정은. 스위스 현지에서 만난 김정은의 동창은 아 직도 그를 농구를 좋아하는 친절하고 평범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유학생 들과 다를 것 없던 10대 소년은 북한으로 돌아가 어떤 마음으로 북한 사회를 바라보 고 북한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을까.
    북한 : 김정은 집권 7년, 북한의 현재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 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김정은이 외 친 약속은 과연 지켜지고 있을까. 북한에 다녀온 재미 언론인의 영상을 입수해 확인 해 보았다. 형형색색의 고층 건물과 자유롭게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 고층 아 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모습에 우리가 알던 북한은 없다. 개혁 개방으로 사실상 시장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김정은 체제. 장마당과 돈주가 이끌고 있다는 지난 7년간의 북 한 경제 변화상에 대해 짚어 본다. 단둥에서 만난 북한 무역상의 “장사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일까.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통해 거머쥔 협상력으 로 천명한 경제 노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2018. 04. 27. 새로운 역사의 시작!
    회담을 일주일 남기고 핵 실험장 폐기를 선언한 김정은. 전에 보지 못한 속도와 방향 으로 성큼성큼 우리 앞에 다가선 김정은과 미・중 사이에서 끝까지 운전대를 놓을 수 없는 우리 정부. 이제는 김정은과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냉철히 판 단하고 과감히 나아갈 때.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남북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한반도 평 화 정착으로 가는 성공적인 발걸음을 준비해야 한다.

    773회 2018-04-16

    너를 보내고. - 416 합창단의 노래 [기획의도]
    2018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이한다. 304명의 억울한 죽음, 그 원인조차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 날의 진실은 미궁 속에 빠졌고, 그사이 4년이라는 시 간이 흘렀다.
    사랑하는 아이를 바다에 묻어야만 했던 부모들. 직접 나서서 그들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희생된 아이의 부모들과 몇몇 시민들이 모여 이룬 416합창단. 그 들에게 노래는 세상을 향한 처절한 외침이자,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 법이다.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밝혀지는 그 날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노래하고 또 노래할 것이라 말한다.
    가장 아픈 이들이 노래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2014년 4월 16일에서 하루도 나아가 지 않은 그들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노래는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노래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주요 내용]
    416 합창단의 시작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노래를 부른다. 참사 이후 500일 경,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공연에서 유가족 몇몇이 노래를 시작했다. 이후 더 많은 유가족들, 음악교사였던 지 휘자, 평화의 나무 합창단 단원, 광화문 서명지기 등 뜻을 함께하는 일반 단원들이 모여들어 ‘416 합창단’이 완성됐다. 416 합창단은 세월호의 아픔과 진상규명의 필요 성을 알리는 동시에 노래를 통한 희망이 필요한 우리 사회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이 들을 노래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일상을 잃은 자리, 노래가 채우다
    처음 416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던 날, 누군가는 ‘자식 앞세우고 노래가 나오느냐’고 손가락질했다. 창현이 엄마아빠는 그래서 더욱 노래했다. 무너진 가슴을 달래기 위 해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던 그들은 자식을 잃은 후 운전대 만 잡으면 솟아나는 눈물 탓에 일을 접었다. 아들 창현이를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삭 발을 하고 단식도 했던 투사엄마 순화씨가 먼저 416 합창단의 문을 두드렸다. 음치아 빠 남석씨도 합류하면서 노래는 부부의 일상을 채우고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 제 엄마는 합창단장이 되었고 아빠는 합창단원들을 위한 바리스타가 되어 커피를 내 린다.
    “별이 된 창현이가, 엄마 아빠가 웃으면서 하루하루 살기를 그 누구보다도 제일 바라지 않을까요.”
    아픔을 어루만지는 목소리
    416 합창단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안산 분향소 앞의 컨테이너에서 노래연습을 한 다. 이들의 테마곡은 ‘잊지 않을게’, ‘약속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포함해 수 십 곡. 합창단이 처음 생기고 지난 3년간 단원들은 그들의 노래를 통해 힘을 얻고 싶 은 누구나에게 달려갔다. 이들은 영하 18도의 혹한에 노동자들의 고공농성 현장을 따듯한 목소리로 녹이고, 고등학생들이 새롭게 새 학기를 시작하는 학교에서 안전 한 사회를 만들자며 노래하기도 한다. “우리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지만 너무나 시민들에게 받은 게 너무나 많다보니 까.. 이렇게 다니면 그나마 빚진 마음이 덜어지는 거 같아요.”
    아이들에게 보내는 노래
    구름 낀 하늘은 왠지 니가 살고 있는 나라일 것 같아서 창문들마저도 닫지 못하고 하루 종일 서성이며 있었지 ... - ‘너를 보내고’ 가사 중에서 4주기를 앞두고 이들의 특별한 합창이 시작된다. 합창단원들의 마음을 담은 곡 ‘너 를 보내고’ 음원을 녹음해 영원히 간직하기로 한 것. 가족들은 노래 간주에 아이들에 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녹음해 넣기로 하는데... 창현아 하늘나라 수학여행 잘 하고 있지 - 잘 지내고 있지, 제훈아? 17년간 네가 엄마 아들이라서 참 행복했어. 태범아,, 엄마,, 누나랑 잘 지내고 있어. 걱정마

    772회 2018-04-09

    대한민국 이재용 ■ 기획의도
    올해 쉰 살이 된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 그는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일조한 혐 의로 수감되었지만 1년을 채우지 않았다. 구치소를 나오는 그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삼성 이재용이 최고권력자와 비선실세에 뒷돈을 대주는 동안 이땅의 2030세 대 이재용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켰다. <대한민국 이재용>은 반칙과 특권이 아 닌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삶을 사는 2030 청년들의 분투기다.
    ■ 주요내용
    • 삼성 이재용
    삼성 이재용은 1968년 생으로 현재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그는 스물 일곱 살에 아버 지로부터 60억원을 증여받았다. 그 돈은 증식을 거듭해 2018년 현재 약 9조원의 가치 에 달한다. 그는 이건희의 외아들로 다른 그룹과는 달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 지 않기 때문에 재산이나 지분, 자리 욕심이 없다. 그의 꿈은 삼성을 이어받아 열심 히 경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업인으 로 인정받는 것 뿐이다. (이재용 2심 최후 진술 중에서)
    • 대한민국 이재용
    IMF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던 고등학생 이재용. 그는 선생님의 후원으로 음대에 진학했고 10년이 지나 음악선생님이 되었다. 음악선생님 이재용(36) 학교에서 교과 수업 외에도 합창단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재능은 있지만 비용이 부담되어 망설이 는 아이를 위해 지인들에게 부탁하며 대학에 진학시키기도 했다. 역사학도 이재용(25)은 내부고발자다. 모 복지기관에서 군복무할 당시 직원들의 비 리를 고발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회유와 왕따였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는 그 는 역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서른 일곱의 실직자 이재 용은 가구배송일을 하다 빙판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져 아홉 번째 직업을 잃었고, 열 번째 직업을 찾고 있다. 스물 여섯의 대학생 이재용은 연극배우 꿈을 간직한 채 공무원 시험 준비를하고, 같은 나이의 대학생 이재용은 꼭 삼성물산에 취엄하기를 희망한다. 노래하는 이재용(이혁)은 잘나가던 팀을 탈퇴하고 꿈을 쫓아 락커로 홀로 서기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 삼성, 그리고 이재용과 싸우는 사람들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에는 작은 비닐 천막이 하나 있다. 삼성 직업병 환자들에 대 한 산업재해 인정과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3월말이면 이들이 거리에 선지 900일이 된다. 그 가운데 뇌종양 수술을 받고 장애인이 된 한혜경씨를 만난다.